文學,藝術/디자인·건축

"상업적인 게 나빠? 좋은 디자인은 원래 상업적"

바람아님 2017. 7. 4. 08:49
조선일보 2017.07.03. 03:02

- 아시아 첫 회고전 여는 카림 라시드
아우디 등 수백 개 기업과 협업
예술의전당서 350여 작품 전시.. 화려한 색·무늬로 시각적 자극

대량 생산은 디자인의 수요-공급 관계를 역전시켰다. 부유하거나 지체 높은 이들만이 수준 높은 디자인을 향유하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 디자이너의 작품은 '제품'으로 만들어져 대중에게 팔린다. '소수를 위한 다수의 디자인'이 '다수를 위한 소수의 디자인'으로 바뀐 것이다.


카림 라시드(57)는 그런 변화를 이끌어온 산업 디자이너다. 이집트 카이로 출신인 그는 화가이자 방송국 세트 디자이너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캐나다 칼턴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디자이너로 출발했다. 아우디·소니에릭슨·시티은행·3M·펩시 등 전 세계 400여 개 기업과 협업한 작품들로 국제 디자인상을 300여 차례 받았다. 파리바게뜨의 생수병이나 애경의 주방세제 용기 같은 제품들로 한국에서도 스타덤에 올랐다.

하늘색‘피트 의자(Fittt Seating)’위에 앉은 카림 라시드. ‘세계 3대 산업디자이너’로 흔히 불리지만 그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영광스럽긴한데, 나머지 두 명은 누구죠?” /박상훈 기자

30일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그의 회고전이 개막했다. 활동 초기 스케치부터 대형 설치작품까지 350여 점이 나왔다. 라시드가 아시아에서 처음 여는 대규모 전시다. 그는 "회고전이 서울에서 열리는 것은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synchronicity)"라고 했다. "형식적으로는 한국에서 들어온 전시 제안에 응했을 뿐이지만, 최근 15년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해온 곳이자 내 디자인을 적극 수용해 주는 한국에서 회고전을 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얘기다.


대담한 곡선, 선명한 색채, 빛나는 광택이 라시드를 상징하는 디자인 언어다. 화려해 보이지만, 그의 디자인 철학은 '감각적 미니멀리즘'이란 말로 요약된다. 라시드는 "미니멀리즘이란 사각형이나 원형같이 정형화된 형태를 사용하는 특정 스타일이 아니라 디자인의 원칙(doctrine)"이라며 "덜어낼 부분 없이 순수한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 미니멀리즘"이라고 했다.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파리바게뜨 생수병.

라시드는 물병부터 아파트까지 디자인한다. 워낙 많은 기업과 일하다 보니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라시드는 "그거(상업성)야말로 디자인의 본질"이라고 했다. "펩시콜라 병을 디자인하는데 어떻게 상업적이지 않을 수 있죠? 디자인은 순수 예술이 아닙니다. 작가가 만족하면 그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의미가 있죠." 널리 쓰여야 좋은 디자인이라는 그의 지론, 이른바 '디자인 민주주의'다.


산업 디자인의 최고 스타이지만 라시드는 "따분하고 물질적인 세계엔 더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구식 사무용 전화기에 비하면 스마트폰은 물질적 재료가 확 줄었죠. 전자기기의 피부 이식이 가능해지면 전화기의 물성(物性)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라, 제품을 쓰는 인간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죠." 그는 "디자인은 과거에서 받은 영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선 라시드의 예술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대형 두상 조형물 안으로 들어가 라시드가 믹싱한 음악을 감상하는 설치 작품, 소프트웨어로 그려낸 몽환적 느낌의 디지털 회화 '디지팝' 연작 등이 전시된다. 후반부에선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구 소장품인 '가르보 휴지통'을 비롯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제품들을 볼 수 있다. 칫솔·안경·신발부터 인간의 성행위를 형상화한 소파까지 넘나든다. 흰 벽을 배경으로 하는 보통 전시와 달리 전시장 내부 벽면까지 화려한 색과 기하학무늬로 채워 짜릿한 시각적 자극을 선사한다. 10월 7일까지. (02)3143-4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