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원서동 ‘공간’ 구사옥(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고 김수근의 건축설계 사무실
회사 성장 따라 30년 동안 변모
주변과 잘 어울리는 외관
군더더기 없이 아담한 실내
한국의 현대건축은 돌아보기 고통스런 시간들을 지나보내고 헐벗고 척박한 잿더미 위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힘든 시기에 큰 짐을 졌던 김중업과 김수근의 존재는 호불호도, 지울 점도 많겠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 건축에 주어진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그중 김수근은 건축을 본업으로 하였으나 수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과 함께 건축을 넘어 예술계 전체에 큰 족적을 남긴 귀감으로 여겨지고 있다.
201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
안국역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걷다 보면 현대건설 본사 사옥 옆에 녹색 담쟁이 잎에 덮인 어두운 회색 전벽돌 건물에 ‘空間’(공간)이라 쓰인 글씨가 도드라진 ‘공간’ 사옥이 보인다. 공간은 건축가 김수근이 세웠고, 건축 역사적 궤적을 따라 많은 발자국을 찍은 건축설계 사무실이다. 그 사옥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30년에 걸쳐 조금씩 넓히고 키우며 회사의 성장과 함께 자라난,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 건물이다. 구사옥(1971년)에 신사옥(1977년)이 한 건물처럼 증축된 후 유리 건물(1997년)이 더해졌고, 벽돌 건물과 유리 건물 사이의 마당에는 한옥과 석탑이 함께 어우러져 독특한 외부 공간과 조망을 형성하고 있다. 벽돌로 된 사옥은, 50년 이상 된 건물로 한정된 문화재 선정의 원칙을 깨고 2014년에 등록문화제 586호로 지정되었다.
도로변의 공간 구사옥이 처음 지어질 당시 주변은 비슷한 규모의 낮은 건물과 한옥들로 가득했고 그 흔적은 안국동과 인사동에 여전하다. 가운데 계단을 두고 반층씩 어긋나게 앞뒤로 나누어진 층은 계단참(계단 중간에 있는 좀 넓은 곳) 면적도 사무 공간에 알뜰히 보태 썼고, 최상층에선 그마저 없애고 더 작은 원형 계단으로 바꾸었다. 계단을 따라 펼쳐지는 위아래 내부 풍경은 같은 법이 없고, 반 층만 오르면 다음 층이니 오르내리는 데 힘든 법도 없다.
진회색 전벽돌은 창덕궁 기와를 닮았고…
구사옥 생활 6년 후 북쪽으로 신사옥이 증축됐다. 구사옥과의 사이에 중정(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을 두고, 이를 둘러싸며 신구 사옥을 이어냈다. 이 중정을 중심으로 두 건물이 함께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풍부한 공간적 경험으로 이어진다. 중정은 둘을 묶어주고, 앞뒤 마당을 통해 안팎을 이어주며, 위아래 층으로 뚫려 시각적, 청각적으로 전체를 연결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두 건물은 구조와 재료, 디테일에 층고까지 차이를 보이지만 겉으로는 쉽게 눈에 띄지 않게 이었다.
‘막 사입어도 1년 된 듯한 옷, 10년을 입어도 1년 된 듯한 옷’이라는 오래된 남성복 정장 광고 문구가 생각났다. 건물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 건축가들은 그런 재료와 디테일로 집을 지으려 노력하길 바란다. 벽돌조의 공간 사옥은 그런 면에서 좋은 예가 될 법하다. 벽돌이라는 재료는 한 공장에서 한때에 나와도 다들 색과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이런 작은 차이를 안고 있는 벽돌들을 모아 벽도 쌓고 계단도 만든다. 그러니 금속 패널이나 유리처럼 매끈하지는 않지만 매일 닦지 않아도 항시 멀쩡하고, 한 귀퉁이 흠이 생겨도 티날 일 없다. 거기다 이곳의 조적(돌이나 벽돌 따위를 쌓는 일) 벽에는 담쟁이가 둘렸다. 진회색 전벽돌은 창덕궁의 기와를 닮았고, 담쟁이는 멀리 두른 산과 궁의 나무를 닮아 어우러진다. 서울 어디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기품이고 자태이다.
3.6m 폭과 2.24m 높이의 실내 공간
‘휴먼 스케일’이라 칭하는 인간을 위한 척도는 공간 사옥의 내외를 두른 벽돌에서도 보이지만 실내 공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많은 건축가들은 모태 공간, 자궁 공간이라 이르며, 인간에게 편안함을 주는 궁극의 위요감(둘러싸여 있는 느낌)과 휴먼 스케일에 대해 생각해왔다. 얼마 전 한국에서도 전시를 유치했던 ‘카바농’은 르코르뷔지에가 스스로 짓고 말년을 보낸, 단어 그대로 ‘오두막’이다. 그를 빼면 건축 역사 집필이 불가능할 정도의 권위와 위상을 지닌 건축가는 말년의 자신에게 바닷가 식당 벽에 덧대어 지은 겨우 4평짜리 공간을 허락했고,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듯 바다에서 수영하다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건축의 가치는 결코 규모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카바농과 공간 사옥은 웅변으로 보여준다. 카바농이 품었던 단출한 집기류와 소박한 공간 규모는 공간 사옥의 내부에서 보이는 그것이다. 카바농은 3.66m×3.66m 넓이에 2.26m의 천장고를 가진 공간이었고, 이는 공간 사옥의 3.6m 폭과 2.24m 천장 높이와 그대로 닮았다. 생전의 김수근은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넓이와 높이의 공간을 말했고, 군더더기 없이 내 몸을 안아줄 듯한 소박한 스케일의 공간을 그렇게 지어놓았다.
최상층에는 김수근이 쓰던 방이 있었다. 온돌방과 서재로 구성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사옥 전체와 교통되는 공적 영역이었다. 다시 말해 이 방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숱한 건축물의 개념과 문화계의 미래를 그리며 자신 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고요한 동굴이었다. 동시에 이 방은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한눈에 넣고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스미게 한 푸코의 파놉티콘(Panopticon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었다.
창덕궁에서 바라보이는 공간 사옥의 창들은 크기도 위치도 모두 제각각으로 질서가 없다. 도로 면과 서측의 입면이 외부에서 건물을 보는 시각을 고려했다면 동측 입면은 내부에서 외부를 내다보는 시각이 고려되었다. 사무실에서 보이는 창덕궁 경관 여기저기를 골라 그림틀인 양 창에 담았고, 철에 따라 변하는 궁의 풍경을 벽에 걸어두었다. 그래서 이쪽 입면은 대외용이 아닌 대내용이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보기 위한 것이다.
김수근이 떠난 뒤, 공간 사옥은 90년대 말에 벽돌 건물과 창덕궁 사이에 유리 건물을 마련하면서 또 한번 증축이 이루어진다. 구사옥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와 기술을 내포한 건물로 공간의 미래를 보여주려 했다. 기존의 환경을 지키고 발전시키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과 존재감은 놓지 않으려 한 그의 동료이자 제자들의 고민이 엿보인다. 하지만 기존 공간 사옥의 비범함은 워낙 특별하고 건축가가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넓기에, 차마 같은 저울에 달아 견주기 힘들다.
꼭대기 김수근 방 사라져 아쉬워
이제 공간 사옥은 우리 곁에 없다. 공간은 건축 사무실로서의 자리매김이 뚜렷했고, 그 사옥은 국내외 건축가들의 순례지 중 하나였기에, 모두들 추이를 살피며 어려움이 잘 마무리되길 바랐다. 수년 전 리노베이션을 거친 공간 사옥은 공간의 위상과 새로운 사업의 의미 둘 다를 넣은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라는 긴 이름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술관으로 변신한 공간 사옥에는 김수근이 거처했던 꼭대기 방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벽돌로 두른 공간 사옥은 여유가 넘치지는 않아도 몸에 꼭 맞는 옷처럼 건축 작업에 알맞은 공간이었다. 재미있게도 전시장으로 적합할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건축가들이 일하고 기거하던 폭 좁고 천장 낮은 공간에선 예술 작품들이 관객을 맞고 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볕이 너무 들고 내부가 훤히 드러나 업무용 시설로는 우려스럽던 유리 건물은 밥도 팔고 음료도 내는 가게가 되어 모양새를 갖추었다. 하나는 길을 잃고 하나는 자리를 찾았으니, 건물 팔자도 뒤웅박 팔자인 모양이다.
투병 중 회사 찾아와 “이 재밌는 일을…”
책 한권으로는 모자란다는 김수근에 대한 많은 일화 중 귀동냥한 하나가 있다. 힘든 투병 중의 그가 한밤중에 갑자기 회사를 찾았다. 여전히 늦은 줄 모르고 일하던 공간의 건축가들에게 그는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너희들끼리만 하느냐?”며 소리쳤고, 깜짝 놀란 이들이 모두 다 몰려나왔다 했다. 차마 꺼질 수 없는 열정과 남길 세상에 대한 근심이 안타깝다. 출중한 재주는 하늘에서 거둬 쓰길 급히 한다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열매 맺기가 더디기만 한 건축계에서 그만한 그릇은 여전히 찾기 힘들고, 후배들은 따르기 벅차니 그의 이른 귀천이 아쉽기만 하다. 문화계의 무거운 한 축을 기꺼이 지탱했던 그의 공간 사옥에 대한 염원은 무엇이었을까?
글·사진 안준석 공학박사·건축가(AIA),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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