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156] 러시아의 화려한 나무 창틀

바람아님 2018. 2. 19. 10:24

(조선일보 2018.02.19 정경원 세종대 석좌교수·디자인 이노베이션)

러시아 중소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집집마다 각양각색으로 치장한 창문틀이 눈길을 끈다.

기온의 연교차(年較差)가 60도를 넘나드는 기후 조건과 전통 신앙이 깃든 주거 문화의 흔적이다.


러시아의 전통 나무 창틀.
러시아의 전통 나무 창틀.


러시아 특유의 통나무집 '이즈바(Izba)'는 9세기부터 짓기 시작하여 점차 러시아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 전역에서 자생하는 소나무 등 침엽수 목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원목을 끼워 맞춤 방식으로 쌓아 올리는 공법이 단순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온이 잘 되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인기가 높았다.


수작업으로 정교하게 만든 나무 장식품으로 창문틀을 치장한 것은 창문으로 혼령이 드나든다는 민속신앙에서 유래했다.

사람의 얼굴과 올빼미의 몸통을 가진 상상의 동물인 러시아판 '인면조(Sirin)' 등의 문양으로 창문틀을 치장하면

악령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정교에서는 제사 대신 가정에서 드리는 추도식에 모시는 혼령이

집을 제대로 찾아오려면 창문틀에 친숙한 문양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19세기 말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의 영향으로 창문틀 장식은 주술적인 의미보다는 예술적 유행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해·달·별·꽃·잎사귀와 줄기 등을 기하학적 문양으로 표현한 나무 창틀을 취향대로 주문·제작하여 설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아파트의 급속한 보급으로 '이즈바'를 새로 짓지 않고 오래된 것들은 철거됨에 따라

나무 창틀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최근 독특한 나무 창틀 디자인을 보존하자는 여론에 부응하여

이반 하피조프(Ivan Hafizov) 등 사진작가들이 '창틀사진 가상박물관' 건립을 위해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나마 전통 주거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