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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164] 1000페이지를 넘어야 할 우리 헌법

바람아님 2019. 8. 20. 12:27

(조선일보 2019.08.20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독립선언서'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달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회동이 있었을 때,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문제가 너무 많이 드러나서 보고서 채택도 거부된 윤석열 검사를 검찰총장에 임명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지적했더니 문재인 대통령이 '규정대로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 보도를 접하는 순간 "어, 대한민국의 고위 공직자 임용 규정에 국회 청문회에서 거짓 발언을 거듭하고

비리 공직자와의 밀착 관계와 가족의 재산 형성상 의혹이 있는 후보가 검찰총장으로 적임자라는 규정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일었다. 다음 순간 "아, 장관급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임명 불가라는 명문 규정이 없는 틈새를 악용한 것을

문 대통령은 '규정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번에 조국 법무장관 지명자가 현란한 풀세트 비리에도 임명이 강행된다면 외국인은 물론 우리 국민도 대한민국의

법무장관은 자격이 불법적 목적을 위해 법률을 능란히 활용할 줄 아는 귀재여야 하는가 보다 하고 경탄·경악할 것이다.


현 정권은 당연히 헌법과 법률의 원칙이 명백히 금하는 바이지만 세세한 금지 조항을 개설할 수 없었던

'틈새'만 헤쳐나가는 것을 '통치' 행위로 간주한다는 생각이 든다. 통치자와 정부 당국이 해서는 안 될 모든 사항을

망라하려면 헌법이 1000페이지가 넘어야 하고 관련 법률과 시행 세칙은 10만권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국정 운영에 관한 법률은 민주국가에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통치자라면 당연히 헌법 정신을 받들면서 국리민복을

위해 성실히, 합리적이고 양심적으로 일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국정 운영의 틀을 제시한 것이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항까지 허가하고 금지하는 문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선봉국 영국엔 성문헌법이 없다. 통치자·피치자의 상호 권리와 의무의 원칙을 규정한 대헌장(大憲章·Magna

Carta) 등 몇 역사적 문서를 기반으로, 국가 대사는 의회의 토론으로 결정한다. 법조문의 구속을 받지 않아도

권력자는 국리민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토론을 통해 최선의 지혜를 도출하는 것이 영국의 저력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정부의 정당한 권리는 '피통치자의 동의'로부터 나오고, 피통치자가 통치 행위에 동의 못 할 때에는

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지금 이 나라 삼부 요인 중에서 국민이 그들의 통치자로서 자격을 인정하는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