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허영한의 사진 前後 - 카메라를 들기 전에…

바람아님 2014. 4. 17. 11:18

(출처-조선일보 2014.01.02 허영한 멀티미디어 영상부 차장)

고뇌에 눌려 눈 감고 있던 그분… 

그날의 '완벽한 사진'이었으나 인간적인 거절에 찍지 못한 나
지금도 아픈 실패의 기억이지만 사진은 直說보다 깊은 이야기…
카메라보다 눈으로 먼저 세상 느껴야

허영한 멀티미디어 영상부 차장"아마추어는 피사체가 두려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프로는 피사체가 두려워할 만큼 들이댄다."

이 말은 후배가 농담처럼 개발한 프로 사진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여러 기준 중 한 가지다. 
20여년간 사진 밥을 먹은 것을 포함해 여러 분류 기준으로 보아 나는 프로에 가깝다. 
그러나 이 기준으로 보면 나는 아마추어에 더 가깝다. 두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약속되지 않은 
여러 자리에서 늘 카메라 들이대는 것을 주저하며 살아왔다. 먼저 관찰하고 느낀 후에 카메라를 
들어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누구나 같은 현장에서 같은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고, 
반드시 가까이에서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약속도 없다는 믿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는 때로 뒤늦은 결단이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아픔이 있긴 했다. 
믿음과 핑계의 차이 또한 모호하지만….

대부분의 직관적인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은 '사진의 순간'에 즉각 반응하며 찍는다. 
그리고 사진에 찍힌 누군가의 프라이버시나 명예와 관련된 우려가 있을 경우 그들의 동의를 받는 절차를 밟기도 한다. 
사전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주지시키면 대부분 사진적 순간은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구실은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대상이 알아채고 행동의 패턴이 바뀌는 순간 '사진은 진실한가'라는 
원초적 고민도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는 많은 경우 이런 순서를 잊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거나 '사람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상과의 교류를 포기해 버리기도 했다. 차라리 그의 주변 풍경과 빛이 만들어준 넓은 현재를 담는 편을 택했다. 
관심 있는 관객이 아니면 그 속에 숨은 이야기들을 읽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매일 독자의 손에서 바쁘게 넘겨지는 신문 자락에 
실릴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 그리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었다.

기자인 나는 뉴스 현장에서도 이 습성을 미처 내려놓지 못해 낭패를 초래한 일이 허다하다. 
1999년 1월, 강직한 성품의 당시 대구고검장이 대검찰청 기자실에 나타나 검찰총장과 수뇌부의 퇴진과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회견을 한 뒤 잠적했다. 검찰 초유의 항명 사태가 발생했다며 모든 언론이 떠들썩하던 그날 나는 밤새 그의 행방을 쫓았다. 
긴 밤을 헛되이 보낸 엄동설한 새벽, 그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고뇌의 통음(痛飮)에 전 그와 마주쳤다. 
공항까지 배웅하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섰던 부인은 차를 가지러 간 뒤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던 
고검장은 불쌍하게 떨고 있던 나를 '추우니 들어오라'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진기자가 뉴스의 중심에 있는 인물과 
단둘이 한집에 있게 된 것이었다. 숙취와 고뇌에 눌린 그는 거실 탁자에 발을 올린 채 소파에 무너져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장면은 그날의 모든 현실을 대변하는 완벽한 한 장의 사진이 될 순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그가 눈을 떴다. 그는 손을 저으며 "에이, 그러지 마"라며 당연한 거절을 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현실적이고 인간적이어서 나는 무너졌다.
 "고검장님, 지금은 괴로우시겠지만, 이 순간은 후에 역사가 될 것입니다. 허락해주십시오"라는 말 따위는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날 나는 고생하는 젊은이로 충분한 대우를 받았고, 기자로서 이 실패의 기억은 지금도 아프다.

[허영한의 사진 前後] 카메라를 들기 전에…/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로버트 카파(Capa·1913~1954)의 말은 프로 
사진가나 프로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다. 
많은 교육자는 과감히 다가가고 치열하게 
찍으라고 가르친다. 
고화질 카메라가 전화기에까지 들어와 있는 지금,
그런 가르침마저 무색할 정도로 대중은 카메라 
들이대는 일에 아주 익숙해졌다. 
그리고 카메라 달린 전화기는 대중을 사진가 
못지않게 치열하게 만들어 주는 기능도 탑재했다.
누군가 길거리에서 싸움만 해도 행인들은 
전화기를 꺼내 든다. 누구보다 현장 가까이에 있고,
'결정적 순간'을 담는 것은 더 이상 사진가들의 
경쟁력이 아니다. 사진의 의미나 고전적 태도 
따위를 설파하는 것은 의미 없어졌다. 
사진가들은 사진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으로 새로운 작법을 
찾아낸 사진가들은 자기 영역에서 여전히 
건재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가장 중요한 
대상인 우리에게 명쾌한 답은 아직 없어 보인다.

사진은 웅변과 직설보다는 어렴풋해도 깊은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이 그 가치가 오래갈 것이다. 
무작정 가까이 다가선다고 사진 찍히는 대상과의 교류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들뿐 아니라 사진을 좋아하는 많은 
이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누구든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에게 보여 줄 사진을 찍는 순간 화자(話者)가 된다. 그의 시각으로 
전해지는 것들이 대부분 본질로 알려진다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신기한 타인과 문물들을 사진으로 무한정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본다. 
교류에 앞서 대상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단계는 수시로 생략된다. 식자들은 이것을 '이미지의 채집'이라고 개탄하기도 한다.

교감이나 소통, 열정, 진심 등 인간관계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무한정 사진에 적용되지만, 사진은 자기중심의 원래적 특성으로 
화자의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관점에 따라 본질은 쉽게 오염될 수 있다. 사진 찍는 모든 사람에게 '먼저 인간이 돼라'고 
가르칠 수는 없지만, 카메라보다는 눈으로 먼저 세상을 보고 느끼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정직한 감정도 착각과 만나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착각과 만용을 재료로 빚어진 걸작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