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셀카봉'

바람아님 2014. 7. 31. 18:55

(출처-조선일보 2014.07.31 오태진 논설위원실 수석논설위원)


지난주 어느 케이블TV 채널에 'SNS 여신(女神)'이라는 스물세 살 여학생이 출연했다. 
그는 자기가 찍은 '셀카' 사진을 SNS에 올려 팔로어 5000명을 거느렸다. 
얼굴 갸름하고 눈 크고 콧날 오똑한 사진들이다. 
스튜디오에 내민 민얼굴은 딴판이었다. 
95㎏ 몸에 작은 옷 억지로 입고 찍은 사진을 몇 시간씩 포토샵으로 고쳐 올렸다고 했다. 
"SNS 세상에선 모든 것 가진 아이였지만 가상 세계에 빠져 살수록 외로웠다"고 했다.

▶셀카에 '얼짱 각도'라는 게 있다. 카메라나 휴대전화 든 손을 쭉 뻗어 옆으로 45도, 위로 15도에서 셔터를 누른다. 
턱은 집어넣고 눈은 치켜뜬다. 볼에는 바람을 조금 넣는다. 
제 사진을 SNS에 띄워 소통하는 셀카 시대에 다들 멋지게 찍고 싶어한다. 
카메라들은 잡티 지우고 이목구비 또렷하게 해주거나 활짝 웃을 때 자동으로 찍는다. 
셀카 사진을 쉽게 보정하는 국산 앱은 1억 다운로드를 올렸다.

[만물상] '셀카봉'
▶셀카는 유행을 넘어 일상이다. 
미국 브라이언트대는 졸업식장 셀카를 금지했다. 
학생들이 호명받아 단상에 오를 때마다 셀카부터 찍느라 졸업식이 한없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트위터에 기내 셀카 한 장이 올라왔다. 
사진 속 남자와 주변 승객이 모두 응급 산소마스크를 썼다. 
비행기는 궂은 날씨 속에 비상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남자는 "생애 최악의 비행이었다"면서도 "재미있는 셀카 사진을 찍었다"고 썼다.

▶요즘 '셀카봉(棒)'이 세계적 히트 상품이라고 한다. 
1m까지 늘어나는 막대기 끝에 카메라·휴대전화를 매달아 셀프 타이머나 리모컨으로 찍는다. 
배경까지 넓게 넣을 수 있어 여행지 셀카에 맞춤이다. 
이탈리아 명소에선 한국인 관광객이 너 나 없이 셀카스틱을 치켜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고 한다. 
예전 카메라는 특별한 도구였다. 
명승지마다 으레 완장 찬 사진사가 있었다. 
삼각대 없이 제주도 신혼여행 사진을 찍느라 돌담에 카메라 얹어놓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사람들은 "한 장 눌러주세요" 하며 낯선 곳에서 낯선 이와 말을 섞었다. 
서로 찍어주는 품앗이도 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내 얼굴 잘 찍는 요령을 내가 잘 아니 남에게 부탁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셀카봉이 잘 팔리는 것은 그만큼 혼자 여행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갖가지 셀카 풍속을 두고 누구는 '디지털 나르시시즘(자기애·自己愛)'이라고 한다. 
숲처럼 무더기로 솟은 셀카봉을 눈앞에서 만난다면 어쩐지 쓸쓸할 것 같다. 
섬처럼 파편처럼 흩어져 '나'만 있고 '우리'는 없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