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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꼭꼭 숨었던 너, 화순赤壁… 1984년부터 출입통제 된 지역… 내달까지 깜짝 공개

바람아님 2014. 10. 30. 12:12

(출처-조선일보 2014.10.30 화순=정상혁 기자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최남선이 조선 10景으로 꼽았고 김삿갓이 세번 드나든 절경…
16개 마을이 수몰된 동복호엔 가을 노을이 붉디 붉다

갇혀있던 빛이 터져나올 때, 비로소 색(色)이다. 울음을 닮았다. 오래 가둬둔 빛일수록 더 크고 맹렬히 전신을 흔든다. 지난 25일, 화순적벽이 30년 만에 처음 일반에 몸을 열었다. 전남 화순군의 동복댐 건설로 1984년부터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출입이 통제됐다가, 관광자원화를 위해 광주시와 화순군이 용단을 내렸다. 올해는 사전 예약자만을 대상으로 11월까지만 시범적으로 문을 연다. 가을이 저무는 동시에 적벽(赤壁)은 색을 감출 것이다. 아무렴, 너무 오래 울면 눈만 빨개질 뿐.
 

25일 동복호에 배를 띄운 뒤 화순적벽을 올려다봤다. 시원하게 뻗은 절벽의 아찔함,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의 연한 홍조가 겹친다. 바람이 시원해 눈이 맵지 않다. 작은 사진은 저녁 무렵의 화순적벽 전경.


 

적벽의 가을을 마주하다

시퍼런 수심 앞에서, 573m 옹성산 서쪽 면이 갑자기 끝난다. 누가 옆으로 할퀸 것처럼 수평의 절리(節理)가 가파르다. 동복댐 상류에서부터 7㎞ 구간에 형성된, 이 오랜 풍화와 침식의 이름이 적벽이다. 배를 띄운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았고, 김삿갓이 세 번이나 드나들다 생이 저물어버린 절벽의 주름진 민얼굴 가까이로 간다. 광주시 상수도 사업본부의 8인승 모터보트를 집어 탔다. 놀란 물오리 떼가 담수 위를 날아오른다.

5분쯤 가면 멀리 대나무숲 너머로 송석정(松石亭)의 팔작지붕이 보인다. 조선조 광해군 때 양인용이 당쟁을 피해 종4품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 소요한 곳이라 한다. 5분쯤 더 가면 정면에 항아리 모양 옹성산이 보인다. 그리고 곧 적벽이다. 화순적벽은 창랑천이 옹성산을 휘둘러 깎아 만든 4개의 절벽, 즉 노루목·보산·창랑·물염적벽을 통칭하는데, 창랑·물염적벽은 도로변에 있어 신비감이 덜하고, 이 중 가장 웅장한 노루목적벽을 보통 화순적벽이라 한다. 원래는 그냥 석벽(石壁)이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유배 온 신재 최산두가 중국 북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쓴 '적벽부'에서 이름을 따 붙였다. 적(赤)이라 했지만, 사실 황(黃)에 가깝다. 거친 화강암의 균열마다 그림자가 스며든다. 거대한 토담 같다.


	전남 화순 절경

배를 더 가까이 댄다. 올려다본다. 고개를 한없이 꺾어야 한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수목이 벽화처럼 붙어있다. 혈기는 빠져나가고 이젠 해와 바람의 물결을 갖게 된 돌이 눈부시다. 기어오른 붉은 담쟁이가 한 폭 산수화에 인장을 찍는다. 적벽의 높이는 80m쯤 되는데, 적벽 중앙에 '적벽동천(赤壁洞天)'이란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 화순 현감 이인승이 새긴 것이다. 신선계 바로 밑에 인간의 마을이 잠겨있다. 20~30m 수심의 끝에 16개 마을이 가라앉았다. 587가구, 2654명이 집을 비웠다. 댐이 생기기 전, 적벽 밑엔 창랑천이 흘렀다. 천이 얕으니, 올려다보는 적벽은 까마득했을 것이다. 해가 기운다. 적벽이 붉어진다.

배에서 내려 차로 10분쯤 달리면 화순적벽 초소, 여기서부터 4.8㎞ 일방통행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망향정이다. 물 밑의 마을을 위해 화순적벽 맞은편, 보산리에 실향민들이 1998년 정자를 세웠다. 망향정 앞 커다란 비석에 새겨진 4언절구 '적벽팔경'이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적벽 위의 불꽃놀이, 학탄에 돌아오는 돛단배 따위를 불러낸다. 이날 댐 수위는 만수(滿水)였다. 노을이 지니 노루목이며 보산적벽의 낯이 불콰해진다.

보산은 고대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였다. 신성한 땅이라, 죄인이라 해도 이곳에 오면 잡을 수 없었다. 3㎞쯤 가다 도로 중간에 차를 세운다. '포토 존'으로 어울릴 만큼 지형이 가장 높은 곳이다. 다시 적벽과 망향정을 바라본다. 해가 넘어간다. 잡을 수가 없다. 

 

 

가을의 끝자락… 마치 봄같은 화순

가을로 물드는 南道

적벽만 있는 건 아니다. 이맘때의 화순은 비로소 터져 나온 색으로 충만하다. 운주사, 세량지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산책 코스가 여럿. 화순적벽에서 남쪽으로 20분쯤 달리면 둔동마을이 나온다. 여기 500년 된 인공숲, 숲정이가 있다. 숲정이는 마을 근처의 숲을 가리키는 순수 우리말. 1550년쯤 이곳 하천에 둑을 만들어 방천을 쌓고 범람을 막고자 느티나무를 심어 조성했다. 왕버들나무·느티나무·서어나무·검팽나무 등 200여 그루의 고목이 동복천을 따라 남북으로 900m 군락을 이룬다. 직경이 60~80cm에 달하는 오래된 노거수(老巨樹)가 산책의 기분을 살린다. 산책로에 5개의 냇둑이 있다. 둑에 앉은 낚시꾼의 등판이 나뭇잎처럼 고요하다.

지는 건 단풍만이 아니다. 한참 걸었더니 허기가 진다. 화순에서 유명하다는 흑두부집 '달맞이 흑두부'로 간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흑두부를 만들어 판 곳이라 한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인데, 문을 열고 식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6m쯤 되는 팽나무가 있다. 500년 묵은 나무라 했다. 전남 장흥 수몰지구에서 가져왔는데, 밑동은 잘려 계산대 옆 테이블로 쓰인다. 보리밥에 청국장, 흑두부보쌈을 주문한다. 흑두부는 진한 회색빛이다. 검은콩으로 직접 쑨 흑두부는 고소하다 못해 달콤하다. 묵은지를 잘게 썰어 볶은 묵은지 볶음처럼 상에 오른 반찬 대부분이 숙성음식이라 야들야들하다. 어린애가 밥 먹다 체하는 걸 '적벽(積癖)'이라 하는데, 그 걱정은 덜어도 될 것 같다.


	화순 남산공원에서 열리는 ‘도심 속 국화향연’. 만발한 국화향이 진하다.
화순 남산공원에서 열리는 ‘도심 속 국화향연’. 만발한 국화향이 진하다.
읍내 민박에서 잤다. 오전 7시, 다시 찾은 숲정이에 안개가 자욱하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뚝뚝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추로(秋露)를 받으며 낙엽을 밟는다. 근사한 시구처럼 입김이 솔솔 피어오른다. 연둔교를 건너 1㎞만 걸어가면 김삿갓이 생을 마감했다는 집 '김삿갓 종명지'가 나온다. 평생을 떠돌았던 그가, 적벽 근처에서 죽었다. '난고 김병연 선생 운명하신 집.' 둥근 돌에 적힌 12자 위로 은행나무 잎사귀가 떨어져 내린다. 할머니 둘이 앞에서 콩이며 고추, 호박 따위를 널고 있다. 두 사람도 은행빛을 닮아간다.

가을엔 꽃도 핀다는 말보다 진다는 동사가 더 어울린다. 29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화순읍 남산공원에서 '도심속 국화 향연'이 열린다. 화순군 군화인 들국화를 테마로 분재국, 다륜대작, 입국 등 국화 32만점을 선보인다. 공원을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350m짜리 국화 길이 있는데, 노랗고 빨간 것이 봄인지 가을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국화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처럼, 연인들이 부지런히 사랑을 속삭인다.


	화순 동복면 구암리에 있는 ‘김삿갓 종명지’. 일대에 김삿갓 동산이 조성돼 있다.
화순 동복면 구암리에 있는 ‘김삿갓 종명지’. 일대에 김삿갓 동산이 조성돼 있다.

	화순 동복면 둔동마을에 있는 ‘숲정이’. 동복천이 맑으니 물에도 단풍이 졌다.
화순 동복면 둔동마을에 있는 ‘숲정이’. 동복천이 맑으니 물에도 단풍이 졌다.
적벽의 아침을 마주하다

오전 9시, 다시 화순적벽을 찾았다. 30년 만의 관광객들이 하나 둘 초소 앞 주차장에 모여든다. 버스는 수·토·일 오전 9시 30분, 정오, 오후 2시 30분 세 번 운행한다. 2주 전 인터넷으로 예약 신청을 받을 때, 이 버스 33석이 20초 만에 마감됐다. 정현창 문화관광해설사가 "안개가 껴 적벽이 보일지 모르겠다"며 걱정인데도, 멀리서 온 얼굴들은 하나같이 해맑다. 30분 뒤 셔틀버스에 탑승한다. 20분에 걸쳐 비포장도로를 구불구불 올라간다. 땅이 좋질 않아 12월부터 내년 2월까진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된다. 두꺼운 거미줄이나 파스텔 색깔의 산새 등 별것 아닌 풍경에도 '첫'이 가져다주는 설렘이 연신 관광객의 입을 벌린다.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둥근 천제단을 지나, 다시 망향정에 선다. 적벽이 명경지수 위에 거꾸로 박혀 2배의 높이가 된다. 안개를 거느리니 진짜 신선이 사는 곳 같다. 관광객 이수원(72)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소풍을 와 배 타고 노 저어 가던 곳이다. 세월이 참 오래 흘렀다"고 했다. 이날만 일반인 관람객 370명이 다녀갔다. 오전 11시, 해가 올라가자 안개가 걷힌다. "와아" 함성이 터진다. 절벽이, 속살이, 본색을 드러낸다.



	전남 화순 위치도

	전남 화순 먹거리

! 여행수첩

적벽 투어 사전예약을 한 인원에 한해 주 3회(수·토·일요일) 35인승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올해는 11월까지만 시범 운행하고,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교통사고 위험 때문에 출입이 통제된다. 소요시간 100분. 원하는 날짜 2주 전 오전 9시에 홈페이지(bus.hwasun.go.kr)에서 예약 가능하다. 만약 11월 1일 예약에 성공할 경우, 11월 15일 관람할 수 있다. 경쟁이 매우 치열하니 '광속 클릭'을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

관람료는 무료지만, 차비 2000원은 현장에서 현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개별 확인을 위해 신분증 필참. 지정된 코스 외엔 사유지라 출입 금지다. 화순적벽 초소(전남 화순 이서면 월산리 산26-4번지)까지는 개별적으로 이동한다. 단체접수는 10인까지. 화순군청 문화관광과(061-379-3501)

달맞이 흑두부 2001년 개업한 각종 음식 정보 프로그램 단골 출연 업체다. 보리밥+나물+흑두부+청국장비빔이 나오는 달콩정식(1인분 1만3000원)과 흑두부보쌈(중자 3만8000원, 소자 3만2000원) 등을 맛볼 수 있다. 흑두부는 1인분에 6000원. 부드러워 소화에 좋다.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 573-41번지. (061)375-8465

도심 속 국화향연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개최한다. 압화(押花) 체험, 국화따기 체험, 연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코스가 준비돼 있다. 무료. (061)379-3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