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行·탐방·名畵/기행·여행.축제

밭담따라..빌레왓따라 쪽빛 바다가 동무하고

바람아님 2014. 11. 1. 09:13
얼굴까지 가린 모자가 보일락말락 얕은 돌담 너머로 호미질을 하던 할머니는 이름 대신 "임씨입니다, 풍천 임씨"라고만 했다. 거듭 물어도 환한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84세로 이제는 많이 못한다고 하면서도 호미를 든 손은 이미 마늘밭 김매기로 되돌아 갔다. 임씨 할머니처럼 기나긴 세월 동안 척박한 터전을 일궈온 애환을 담은 이야기길이 제주에 생겼다. 제주관광공사는 25일'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을 개설하고 길 열림 행사를 열었다. '바당밭 빌레왓을 일구는 동굴 위 사람들의 이야기길'이라는 부제가 지질트레일의 모든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여행객이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14번째 포인트 월정밭담길을 걷고 있다. 이곳은 올해 국제식량농업기구로부터 세계농업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암반지형에서 캐낸 돌로 담을 쌓고, 그 공간에 흙을 채워 밭을 만든 전형적인 '빌레왓'이다.

월정밭담길에서 한 학생이 캔버스에 빌레왓을 그리고 있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개설 행사가 열린 25일 지역 예술인들이 월정밭담길 입구에서 축하연주를 하고 있다.

구좌읍 월정리 제주동부보건서 뒷편에서는 부채살 모양으로 퍼진 빌레위를 걸어볼 수도 있다.

여행객들이 검은 현무암 밭담과 초록 당근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진빌레길을 걷고 있다.

'바당밭 빌레왓'은 통통 튀는 어감에도 뜻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바당밭'은 바다도 밭처럼 생활터전으로 일구면서 살았다 점을 강조한 표현이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와 월정리 지역은 빌레지형이라 밭농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반농반어로 생계를 꾸렸다. '빌레'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지형이니 굳이 방언이랄 것도 없다. 유동성이 크고 점성이 낮은 용암이 넓게 펼쳐진 암반층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에서 캐낸 돌로 밭담을 쌓고, 거기에 외부에서 가져온 모래와 흙을 깔아 일군 밭이 빌레왓이다.

트레일코스 13번째 포인트 진빌레는 이런 빌레로만 이루어진 길이 400~500m가량 이어진다. 빌레를 다듬어 농로를 만든'긴 빌레 길'이다. 맨발로 걸으면 자연 지압길이다. 이어지는 월정밭담길은 올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빌레에서 캐낸 돌로 쌓은 밭담은 사유지의 경계인 동시에 바람과 가축의 피해를 막기에도 효과적이다. 땅이 얕아 기를 수 있는 작물은 한정돼 있다. 마늘과 양파는 늦가을에 심어 봄에 수확하고 여름에는 콩과 녹두를 기른다.

곡선이 완만한 언덕으로 이어진 밭담은 소박하면서도 정성스럽다. 검은 현무암이 초록빛 마늘밭과 대조를 이뤄 빌레왓을 일구며 흘렸을 땀방울만큼 아름답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밭 가장자리로 판 수로는 지혜만큼이나 눈물겹다. 일반적으로 수로는 물을 대는 시설이지만 빌레왓의 수로는 배수시설이다. 암반 위의 밭은 자연배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자리를 그보다 더 낮게 파고 이중으로 돌담을 쌓아 수로를 만들었으니 그 고생스러움을 짐작하기도 힘들다. 밭담 사이사이로 보이는 무덤을 두른 돌담은'산담'이다. 높지 돌담이 삶과 죽음의 경계다.

구좌읍 김녕리의 게웃샘굴 위로 마을이 형성돼 있다. 이곳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마을의 식수원이었다.

바다에서 솟아나는 용천수 청굴물은 김녕 주민들의 야외 목욕탕이다. 탕과 연결하는 곡선길이 녹색을 띤 바닷물과 어울려 설치미술처럼 아름답다.

바다색이 고운 김녕리 세기일 해변에서 요트 꿈나무 한지연(김녕중3년) 양이 연습을 위해 배를 띄우고 있다.

'동굴 위 사람들'이라 부른 이유는 게웃샘굴에서 찾을 수 있다. 김녕어울림센터 옆 마을 좁고 복잡한 골목길 한 켠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전설의 용천수가 분출하는 동굴이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근 200여 가구의 식수원이었다. 동굴 위엔 천연덕스럽게 살림집이 자리잡았다. 농지가 부족한데도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굴주변에서 분출하는 용천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웃샘물은 약 250m떨어진 바닷가의 용천수 청굴물과 이어져 있다. 썰물 때만 이용하고 밀물 때는 들어갈 수 없다. 밭일에 지친 주민들이 몸을 담그던 샘물로 차갑기로 소문나 한여름에도 5분을 버티기 어려울 정도란다. 청굴물로 들어가는 길과 두 개로 분리한 탕의 곡선이 바다의 설치작품처럼 매끄럽다. 1971년에 정비한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됐다.

제주민속신앙에서 빼놓은 수 없는 것이 당(堂) 신앙이다. 할망당에서는 아이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해신당에선 바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본향당에서는 빌 수 있는 모든 것을 빌었다. 지질트레일 7번째 포인트는 김녕중학교 후문 쪽에 위치한 본향당이다. 신목(神木)으로 삼는 커다란 팽나무 앞으로 정방형의 돌담 울타리가 정갈하다. 보통은 남성신을 모시는 곳이지만 김녕본향당은 여성신을 섬긴다. 정월과 7월?9월 당제의 제관도 여성이다. 가족의 안녕을 빌고, 고민도 털어놓고, 신세 타령까지 하기에 본향당은 여성에게 훨씬 잘 어울리는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본향당에서 조금 올라가면 궤네기굴과 궤네기당이다. 궤네깃또(궤네기 신)에게 돗제를 올리는 공간이다. 궤네깃또는 요즘 말로 하면 '먹방의 신'이다. 척박한 빌레왓을 일구려면 잘 먹여야 한다.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재산인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돗제다. 돼지배설물은 빌레왓에 영양을 공급하는 소중한 거름이다. 물 빠짐이 좋은 현무암 바닥으로 만든 돗통시(돼지우리)는 고체거름을 생산하는 중요한 장소다. 제가 끝나면 모자반으로 몸죽을 끓여 온 동네 사람들이 음식을 나눴다. 트레일 19번째 포인트 월정리 바닷가에는 해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선 한해 3차례'멜굿'을 지내는데, 어부와 해녀의 안전과 지역 특산물인 멸치의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다.

구좌읍 월정리 바다색이 예술이다. 연한 푸른빛 바닷물속에 검게 보이는 부분은 용암석이다.

김녕 성세기해변은 하얀모래와 푸른바다색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햇살이 비친 물살아래 하얀 모래가 투명하게 비친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김녕어울림센터를 출발해 빌레길을 따라 월정까지 갔다가, 해안도로를 따라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14.5km 걷기코스다. 해안도로를 따라 되돌아오는 코스는 제주 어느 지역보다 바다색이 곱다. 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가득한 해변에서 투명하게 시작한 바다색은 먼바다로 나갈수록 점점 쪽빛으로 변한다. 그 사이사이에 바다로 흘러내린 용암을 덮은 바다는 검은 점이 되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빌레길이 사람 사는 이야기로 가득한 공간이라면, 물빛 고운 바닷길은 여행자들이 저마다의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 넣을 공간으로 남아있다.

지질트레일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김녕어울림센터에서 얻을 수 있다. 길을 걷는 동안 그늘이 거의 없어 자외선 차단제와 모자는 필수다. 마을을 벗어나면 편의시설이 부족해 마실 물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사전정보는'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핵심마을 활성화 사업' 홈페이지(jejugeopark.com)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