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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중화 경제 질서 해일..삼켜지거나 올라서거나

바람아님 2014. 11. 23. 10:57

[출처 ; SBS]

 

  

한중 FTA가 타결됐을 때 협상을 도우며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한 인사의 표정은 꽤나 상기됐었습니다. 막판 줄다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갑자기 한꺼번에 풀렸다는 것입니다. 중국 정권 수뇌부 차원의 결단이 작용하지 않았겠느냐 추측했습니다. 그러면서 감탄사처럼 한 마디 했습니다.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정말 좋아하나봐."

세계의 천부적인 장사꾼으로 흔히 3개 민족을 꼽습니다. 유태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중국인입니다. 모두 이익을 따지는데 철저해 손해 볼 짓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런 중국이 '한국이 좋아서' 양보를 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다 속내가 있습니다.

속셈이 도대체 뭘까? 이런 궁금증은 오래지 않아 풀렸습니다. 최근 중국의 거침없는 경제 외교 행보를 보면서 '과연 그러했구나'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중국은 APEC 정상회담 직전 한중 FTA를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APEC에서는 미국의 견제를 이겨내고 FTAAP(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 로드맵 비준을 성사시켰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보다 한 발 앞서나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입니다.

지난 8일에는 시진핑 주석이 중국 단독으로 4백억 달러, 우리 돈 약 44조 원을 출자해 '실크로드 기금'을 창설하겠다고 제창했습니다. 중국은 이미 '일대일로', 즉 新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 건설을 위해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를 설립하면서 1천억 달러, 1백10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또 다른 돈주머니를 풀겠다는 뜻입니다.

아세안 회의에 참석한 리커창 총리도 추임새를 넣었습니다. 해상실크로드 은행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여기에 최소 50억 위안, 우리 돈 약 9천억 원의 자본금을 출자할 계획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호주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는 호주와 FTA 타결을 선언했습니다. 한중 FTA 만큼이나 속전속결입니다.

그리고 후강퉁, 즉 상하이와 홍콩의 주식 시장의 교차거래를 허용했습니다. 시가총액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공룡 주식 시장을 창출했습니다. 중국 자본시장을 개방해나갈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중국 위안화의 세계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행마를 통해 중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 중화 경제 질서의 청사진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중국은 지금까지 11건의 FTA를 맺었습니다. 아세안, 즉 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파키스탄,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이 주를 이룹니다. 여기에 덩치가 큰 경제권인 한국, 호주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주요 경제권을 거의 모두 아울렀습니다. FTAAP를 위한 징검다리를 다 놓은 셈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양인 태평양을 둘러싸고 하나의 경제 블록을 만들겠다는 중국의 야심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답게 돈 주머니를 팍팍 풀고 있습니다. 중국의 구상대로 두 경제권역이 조성될 경우 무려 44억 명의 인구에, 총생산량 21조 달러의 초거대 경제권이 탄생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치보다 이 지역의 잠재력이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육상 실크로드에는 중앙아시아의 드넓은 초원을 따라 수많은 저개발 국가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막대한 지하자원과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시장을 보유한 지역입니다. 해상 실크로드는 동남과 서남 아시아 지역을 포괄합니다. 원자재 공급처로서, 상품 시장으로서의 가치는 추정조차 어렵습니다.

이런 경제권들을 중국이 주도적으로 이끌겠다며 날줄과 씨줄을 촘촘하게 짜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최근 한 달 사이에 전광석화처럼 밑그림을 그려넣고 있습니다. 중국의 움직임은 미래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추동력의 키를 자신들이 잡겠다는 선언입니다. 과거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한 유럽, 현재 팍스 아메리카를 구축한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야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셈입니다. 도광양회, 몸음 낮추고 실력을 키운다던 중국의 전략은 어느덧 기억조차 가물가물 해졌습니다. 이제 세계 경제, 그에 기반한 패권을 추구하겠다는 도전장을 세계에 노골적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틀어쥐려는 경제권을 보면 일종의 기시감이 느껴집니다. 육상 실크로드에 위치한 중앙 아시아, 해상 실크로드에 포함된 동남과 서남 아시아, 태평양을 둘러싼 중남미 등은 모두 옛 대우 그룹이 '세계 경영'을 외치며 진군해 들어갔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지금까지도 '대우'라는 브랜드가 회자될 정도입니다.

대우는 당시 세계 초유의 시도에 나섰습니다. 아직 시장이 채 형성되지도 않았던 이 지역을 경제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숙된 시장 대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주변 국가에서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미개발 시장을 뚫어 선점함으로써 우회로를 통해 세계 경제의 중심에 우뚝 서겠다는 전혀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대우의 야심찬 도전은 하지만 끝내 실패로 귀결됐습니다. 시장 체제가 갖춰져 있지 않다보니 뒷문을 열어야 했고 여기에 들어갈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각종 탈법과 불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런 비윤리적인 경영은 결국 덫이 돼 대우 그룹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그런 어마어마한 도전은 한 기업 차원에서 이뤄내기에 버거웠습니다. 무모한 시도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이제 중국이라는 사상 유래 없이 거대한 국가가 비슷한 전략을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대우의 유산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반면 중국은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모습입니다. 다만 더 막대한 규모로, 더 치밀한 계획 아래, 막대한 정치력과 자본력을 동원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거침없는 굴기를 지켜보는 우리로서는 두려움과 함께 아쉬움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기회입니다. 큰 파도에 삼켜지면 나락으로 떨어지겠지만 그 파도위에 올라서면 힘들이지 않고 멀리, 빨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경제 논리 뿐 아니라 국제 정치와 안보 문제까지 엮여 운신에 제약도 많습니다.

그러니 한중 FTA를 맺었다고 마냥 박수 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거대한 중화 경제 질서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느냐, 중국이 추구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지렛대 삼아 세계의 중심에 서느냐, 기로에 서있습니다.

우리 경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우상욱 기자woosu@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