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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다이어리] 할머니 수난시대

바람아님 2014. 12. 8. 10:48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호정/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예순 살 순이씨가 늦은 저녁 귀가했다. 그러나 불은 켜지 않았다.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소박한 저녁을 먹는다. 그래도 불은 켜지 않는다. 저녁을 다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TV를 켜고 우두커니 앉았다. 역시 불은 꺼둔 채로.

 여기서 퀴즈. 순이씨는 왜 불을 켜지 않을까. 요새 도는 말에 따르면 정답은 ‘아파트 옆 동에 딸이 있어서’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엄마 옆 동으로 이사 와서, 엄마 집에 불만 켜지면 쪼르르 달려온다는 것이다. 더구나 애를 데리고.

 “오죽하면 없는 척했겠니.” 이 얘기를 듣던 친정엄마는 아파트 옆 동을 흘낏 보며 말했다. 나는 그중 한 집을 가리켰다. “저기는 어떨까? 빈집 같은데….” 엄마의 눈이 흔들린다. 17개월 된 아들은 뛰어다니며 놀다가 갑자기 화분의 흙을 파서 던지기 시작했다. “이 동네 집 잘 안 나와. 요새 더 안 나온대.” 엄마의 목소리가 떨린다.

 오늘 아침 출근길엔 아이가 엉엉 울었다. 번쩍 들어 시어머니에게 안기고 나왔다.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고, 먹이고, 재웠을 것이다. 그러느라 약속도 취소하시진 않을까. 하고 싶으신 걸 못하진 않을까. 모르는 편이 낫다. 친정엄마 말을 못 들은 체하고 근처 부동산에 연락처를 남기고 왔듯이 말이다.

 결혼과 함께 어른이 된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독립도 한 줄 알았다. 이건 오만에 가까웠다. 아이는 스스로 낳았는데, 키우는 건 혼자 못하고 있다. ‘할머니’가 필요했다. 일하는 여성이 아이를 가지면 주위에 ‘별일 없는 할머니’부터 찾는다. 육아 도우미와는 별개다. 퇴근이 늦어진 날, 갑자기 출근해야 하는 휴일, 도우미가 갑자기 못 나오는 날에 아이를 맡길 할머니가 절실하다. 할머니는 종신제 도우미에다, 사랑도 무한대고, 5분 대기조라고 믿는다. 불만 켜지면 집으로 달려오는 딸이 괜히 된 게 아니다.

 그런데 최근 내 입맛에 맞는 조사 결과를 발견했다. 민간 기관 엠브레인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아이의 부모들은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조부모가 양육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문항에 36.1%만 동의했다. 그런데 조부모들은 65.3%가 동의했다. ‘자녀를 돌봐줄 친가·외가 부모님이 없으면 맞벌이하지 않는 게 낫다’는 문항에는 각각 53.6%, 34.7%가 동의했다. 정리하면 할머니·할아버지들은 맞벌이를 응원하고 있으며, 아이는 자신들이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는 뜻이다.

 자녀 육아가 고되면서 행복한 일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손주 키우기도 그런 모양이다. 천국과 지옥의 범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