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357

[백영옥의 말과 글] [349] 불행과 다행

조선일보 2024. 4. 13. 03:00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편의점 리테일 본부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자기가 관리하는 알짜 점포를 가로챈 선배 일로 부아가 나 있는데, ATM 기계를 독차지한 남자 때문에 분을 삭이는 장면이 나온다. 설상가상 뒤에 서 있던 아저씨가 버스 시간을 놓칠 것 같다며 양보를 부탁하자 주인공은 짜증을 누르고 양보하는데 그가 사라진 후 반전이 펼쳐진다. 최근 20·30대의 우울증 증가 원인을 SNS에서 찾는 기사를 보며 나는 이 장면을 떠올렸다. 내 할머니는 평생 고향에 머물며 고작 이웃들이 비교 대상이었다. 하지만 국제화한 요즘 세대는 세계 최고와 비교하며 스스로 초라해지는 순간을 수시로 경험한다. 그런 이유로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면화했다....내면의 수치심..

[백영옥의 말과 글] [348] 유모차와 개모차

조선일보 2024. 4. 6. 03:00 아픈 아버지를 더 잘 돌보기 위해 동생이 운영하는 소아과 근처의 요양원을 선택했다는 편집자가 얼마 전 아버지를 보살피러 근처에 갔다가 본 풍경을 말했다. 동생의 소아과 앞으로 석 대의 유모차가 지나가길래 살펴보니 그 안에 아기가 아닌 강아지가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줄어든 어린이 환자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동생 얘길 하다가 그녀는 10년간 폐업한 동네 소아과가 여럿인데 그 자리마다 요양원이 들어섰다고 말하며 허탈해했다. 애견박람회장에서 “개 같이 벌어서 개한테 쓴다!”는 플래카드를 보고 애완의 시대에서 반려의 시대로 변했다는 걸 실감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다. 내가 사는 동네엔 24시간 애견 편의점에 이어 강아지 모발건강까지 챙기는 토털 애견 뷰티숍이 생겼다. 강..

[함영준의 마음PT] 환각제 LSD가 우울증 치료제로 사용될 수 있을까?

조선일보 2024. 4. 2. 05:50 # 마음이 힘들어 병원을 찾아가면 약물치료가 대부분이다. 상담이나 인지행동치료가 있으나 아직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약물은 의존적일 수 있고, 오래 지속하면 환자 본인의 치유 노력을 감퇴시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3의 대안으로 ‘명상’을 연구하는 의사들의 모임이 있다. 정신과 의사들과 임상학자들이 주축이 된 대한명상의학회(회장·이강욱 강원대 정신과)다. # 지난 주말(3.30~3.31) 서울성모병원에서 열린 대한명상의학회 2024년 춘계학술대회 및 워크샵에서는 다양한 흥미로운 주제들이 발표됐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마약이라고 부르는 LSD 등 ‘사이키델릭’ 약물을 의료치료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최근 명상 관련 교류차 미국 하버드대를 방문했던..

[백영옥의 말과 글] [347] 인생의 흙탕물

조선일보 2024. 3. 30. 03:01 한 유튜브에서 개그우먼 정선희가 남긴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그녀는 한동안 TV에서 자취를 감췄는데 웃음을 주는 직업을 가진 그녀에게 그 일은 치명적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정신을 차린 그녀는 포털 사이트에 눈물 흘리는 자신의 사진이 너무 많이 도배돼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포털 측과 상담 전화 끝에 사진을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울컥한 마음에 “내 사진인데 못 지우면 어떡하냐!”고 항변했더니 포털 직원의 조언은 새로운 사진으로 업로드하라는 말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리기 힘들다. 일기예보에는 맑은 날이 많지만 삶에는 비 오는 날도 많다. 우산을 써도 비 오는 날 길을 걷다가 흙탕물을 뒤집어쓸 때도 있다. 기대..

[백영옥의 말과 글] [346] 아주 보통의 작별

조선일보 2024. 3. 23. 03:02 죽음은 꼭 절망이며 어둠일까.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에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한적한 곳에 문을 잠그고 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게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 불안한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감각이 생기는데, 그 느낌이 자기 삶의 단단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이토록 명징한 것이라면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회복 불가능한 불치의 병에 걸려 긴 고통을 그만 멈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조력 사망이 가능한 스위스의 한 단체로 향하는 여정을 지켜봤다. 영상에 달린 수많은 댓글 속, 다양한 의견과 가슴 아픈 사연을 읽으며 나는 국회에서 여전히 계류 ..

[백영옥의 말과 글] [345] 지금 여기에 머무르기

조선일보 2024. 3. 16. 03:02 오래전 노트를 보며, 서른 몇 살의 나는 가지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게 참 많았구나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정작 의아한 건 리스트 대부분을 이뤘는데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나 자신이었다. 가지고 싶던 건조기, 식기세척기를 사도 시간이 부족한 이유는 뭘까. 효율성을 강조할수록 청결 기준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문득 지나간 버킷 리스트에 추가되고 수정된 내 열망의 목록을 보며 내가 길이 아닌 러닝머신 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그곳에서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법이 쉼 없이 달리는 것뿐일까. 머신에서 내려온다면, 전원을 끈다면 어떨까.명상은 전원을 끄고 내려오게 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명상의 핵심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직 현재에 머무는 것이다. 명상을..

조력존엄사 선택할 권리, 아직 금기인가 이제 공감인가

중앙SUNDAY 2024. 3. 9. 00:15 수정 2024. 3. 9. 01:08 [비욘드 스테이지] 조력존엄사 다룬 연극 ‘비Bea’ 화제 지난 4일 저녁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연극 ‘비Bea’(3월 24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의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연극에 관한 토크콘서트는 국내 최초인데다 요즘 화두인 조력존엄사에 관한 내용이라 이목을 끌었다. 낯선 풍경이었지만 특별한 홍보 없이 관객 백여명이 모였는데, 그중 작품을 5회 이상 관람했다는 관객이 십여명, 무려 11차례나 봤다는 팬도 있었다. 2010년 런던에서 초연된 이 작품을 2011년부터 국내에 제안했던 석재원 프로듀서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단어를 자기성찰이나 사랑으로 승화시켜 죽음을 통해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음을 전달하는 ..

[백영옥의 말과 글] [343] 효율과 효과

조선일보 2024. 3. 2. 03:00 수년째 아침에 커피콩을 갈아 커피를 내린다. 효율을 따지면 원두 스틱 커피를 마시는 게 좋지만 커피를 내리며 향을 느끼는 과정이 소중해서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후배가 자주 쓰는 단어는 효율인데, 그녀는 달리면서 팟캐스트를 듣고, 일을 하면서 책상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 믿는다. ‘효과’가 실제 목표에 가까워지도록 일하는 것이라면 ‘효율’은 일을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하는 법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게 정말 ‘효과’적인지에 대해선 고민해봐야 한다. 효율과 효과의 차이는 깨어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수면 시간에서도 드러난다. ‘하버드 불면증 수업’의 저자 ‘그렉 제이콥스’는 사람들은 불면증의 기준을 수면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더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