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氣칼럼니스트/송호근의 세사필담 15

[송호근의 세사필담] 측근도 못 구하는데 나라를 구할까

중앙일보 2023. 3. 21. 01:21 수정 2023. 3. 21. 06:52 「 대장의 품격은 책임 지는 것인데 비리 혐의에 충복들만 생명 잃어 ‘살인자 검찰’ ‘일제 앞잡이’라며 숨는 대장이 어찌 나라를 구할까 」 막무가내 반일(反日)신념. 한국인에게 반일은 상수일 터에 그걸 선동해 철옹성을 칠지, 미래의 정기(精氣)로 변환할지가 쟁점이다. 일제에 희생된 중국 인민은 무려 1000만 명에 이른다. 중국 난징학살 희생자 기념관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 중국은 피해보상 요구를 일찍이 접었다. 그런데 우리의 좌파는 징용·위안부 보상방식이 엇나가자 간토대지진을 들고 나왔다. 베트남은 2000년 역사에서 중국 기마군단에 수십 차례 짓밟혔다. 100년을 지속한 왕조가 없을 정도지만..

[송호근의 세사필담] 21세기 '한국책략' 반도체

중앙일보 2022. 08. 09. 00:53 「 4만4000명 미국 병사 희생 딛고 전쟁 없는 70년 평화시대 누려 디지털시대 최대안보는 반도체 칩4동맹, 지정학적 비운 벗는다 」 “쉿, 조용!” 워싱턴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세워진 ‘19인 용사상’의 선두병이 발한 사주경계 명령. 장진호 혹한을 뚫고 퇴각하는 미국 용사들의 겁먹은 표정이 가슴을 친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렸다. 영하 25도, 어느 나라인지 모른 채 파병된 산악에서 미국 병사 수천 명이 갇혔다. 미10군단 패잔 병력은 북한주민 10만 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났다. 미국 병사들은 비로소 전쟁, 그것도 공산권과의 전면전임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화천에 집결한 인민군 7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는 6월 25일 새벽 4시 허리춤 권총을 빼 들었다. T..

[송호근의 세사필담] 출항 고동은 우렁찼는데

중앙일보 2022. 05. 17. 00:39 「 자유시민 세계시민 언급은 호평 순환논리에 갇혀 현실감 떨어져 취임사는 일차원 에세이가 아닌 정교한 시대 조망 설계도 담아야 」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연단에 선 모습은 낯설었다. YS나 DJ같은 위엄과 경륜이 그리웠다고 할까. 막중한 대업에 곧 적응할 거라는 희망적 사고를 애써 떠올려 우려를 날려 보냈다. 마침 화창한 오월의 햇살에 집단 기대는 한층 부풀었고, 여의도 상공엔 무지갯빛 채운(彩雲)도 떴다. 취임사는 간결했고 명료했다. 게다가 역대 취임사의 단골 개념인 국민과 민족을 잠시 내려놓고 자유시민, 세계시민 같은 지성 담론과 접속한 것은 뜻밖이었다. ‘자유!’를 수십 번 외친 대통령의 출항 고동은 우렁찼다. 딱 거기까지였다. 여의도광장에 운집한 축하객들..

[송호근의 세사필담] 유배형에서 살아온 사람은 겁이 없다

중앙일보 2022. 04. 19. 00:47 한국에서 피의자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이다. 누군가 앙심을 품고 고소하면 된다. 고소공화국 한국에는 사전 중재절차가 없다. 일본은 소액 사기·횡령, 경미한 모욕사건은 변호사 상담 및 중재를 통해 해결한다. 급이 안되는 사건은 아예 사법기관에 접수조차 안 된다. 인구 1억2600만 일본에서 형사고소건이 한국의 5% 정도, 피의자는 2%에 그치는 이유다. 2021년 한국엔 형사사건 83만건, 민사사건 36만건, 총 119만 건이 발생했다.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와 음해·무고성 복수극이 섞였다. 징벌과 한풀이에 경찰과 사법기관이 동원된다. https://news.v.daum.net/v/20220419004728698 [송호근의 세사필담] 유배형에서 살아온 사람은 겁이 ..

[송호근의 세사필담]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 마라

중앙일보 2022. 03. 22. 00:47 「 소셜미디어가 극단적 증오 양산 끝낼 것은 절망, 버릴 것은 분노 시민정치 위해 구중궁궐 나와야 양당 대치를 끝낼 초당적 설계를 」 긴 겨울이었다. 서울에도 꽃망울이 맺혔다. 지난 주 섬진강변 매화마을은 인파로 붐볐다. 마스크를 쓴 남녀노소가 코로나를 뚫고 터진 하얀 꽃무리와 어우러지는 풍경은 눈물겨웠다. 나의 시선은 배낭을 메고 홀로 걷는 젊은이에게 멈췄다. 시대가 안겨준 절망을 배낭에 꾸려 산천에, 꽃 천지에 매장하러 왔는지 모른다. 사실 매장해야 할 것은 절망만이 아니다. 분노다. 선거는 끝났지만 아직도 연소되지 못한 분노가 마그마처럼 꿈틀대는 중이다. 20, 30대 남녀 간 엇갈린 표심의 공통 정서는 분노였다. 대체 희망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초접..

[송호근의 세사필담] 두 개의 지옥 문, 오미크론 대선

중앙일보 2022. 02. 22. 00:40 「 오미크론 창궐 와중에 투표해야 사람 죽는데 공약이 무슨 소용 망가진 한국정치에 얹힐 대통령 4당 특단의 조치가 협치의 시작 」 2년 전 4월, 벚꽃 총선을 기억한다. 37개 비례정당이 늘어선 투표용지를 들고 망연자실했던 모습을. 코로나 1파가 가라앉던 시기였음에도 시민들의 가슴엔 공포심이 가득찼다. 하루 확진자 100명, 요즘 같으면 마스크를 벗어 던져도 될만한 숫자였다. 2년이 지났다. 하루 확진자 10만 명, 누적 사망자가 1만 명을 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다시 투표행렬에 서야 한다. 전파력이 강한 그놈의 활공을 피해 도장을 꾹 눌러야 한다. 투표용지는 2년 전의 그 망연자실함을 증폭한다. 이번에는 정치공포도 겹쳤다. 창궐하는 오미크론이 생지옥인 것처..

[송호근의 세사필담] 첫 발자국

중앙일보 2022. 01. 25. 00:40 「 민주화 35년, 이립을 지나 불혹 첫 발자국의 설렘과 감동은 실종 정권은 리바이어던의 족쇄 풀어 시민 양심에서 생동력 분출될 것 」 첫 발자국만큼 가슴 설레는 말이 있을까. 눈 덮인 오솔길에 찍힌 첫 발자국, 그걸 따라 난 종종걸음 흔적은 미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 발자국의 주인공은 봄을 그리며 겨울을 나고 있을 거다. 갓난아기의 첫걸음은 가족의 환호성과 함께 추억에 접혀 있다. 삼십이립(三十而立)을 향한 대장정의 첫발을 누가 잊으랴. 1977년 발사된 보이저 1호는 태양계 바깥 담장에 도달했다. 지구에서 228억 ㎞란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첫발을 내디딘 건 1987년, 필자가 30대 초반의 일이다. 그 설렘과 벅찬 감동을 가슴 한 켠에 지피며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