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리/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어디 술뿐일까. 시골에서 나고 자라 나무 박사, 꽃 박사인 아빠를 둔 덕분에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로 구박받는 호박꽃이 실은 담박하니 예쁘단 걸 안다. 애기똥풀꽃·며느리밥풀꽃·홀아비바람꽃… 사연처럼 애잔한 들꽃들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미팅 자리의 단골 질문이던 “좋아하는 꽃이 뭐예요?”에도 주저 없이 “패랭이꽃!”을 외쳐 남자들 진땀깨나 흘리게 했던 나다.
요즘은 ‘성교육’으로 대체된 이른바 ‘순결교육’을 시켜 준 것도 아빠다. 갓 중학생이 된 딸에게 무슨 영화 속 대사라며 넌지시 ‘손수건론’을 들려주셨다. 깨끗이 빤 새 손수건은 땀도 조심조심 닦지만 한 번 땀을 닦으면 코도 풀게 되고, 이왕 코까지 푼 뒤엔 구두도 쉬이 문지를 수 있다는 거였다. 어린 마음에도 “절대 코 푼 손수건 신세가 되진 않겠다”며 ‘정조 관념’을 확실히 다잡았던 기억이 난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은 아빠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이만큼 사람 구실하기까지 이끌어 준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귀인’들이 나타나 천둥벌거숭이 같던 나를 갈고 깎고 다듬어 주셨다. 요컨대 그분들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경험이 쌓이고 쌓인 결정체가 현재의 나인 셈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가 퍽 대단한 사람인 듯 느껴지는데 물론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낳자마자 걷고 뛰는 다른 짐승들과 달리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미약한 존재로 세상에 온 우리. 이런 우릴 온전한 사람 꼴 나게 만들어 준 이들의 노고를 잊지 말자는 얘기다.
학교 때 은사들만 해도 그렇다. 학창 시절이라 하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은 일만 떠오른다는 게 남자 동료들의 볼멘소리다. 하지만 한 번 곰곰 생각해 보시라. ‘미친개’‘불곰’이라 불리던 악명 높은 학생 주임들도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 한두 마디 안 하셨을 리 없다. 독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약이 되는 가르침도 분명 있었을 터다.
학원도 과외도 금지된 군부 독재 시절, 내게 영어의 세계를 처음 열어 주신 중학교 1학년 때 영어선생님만 해도 그랬다. 원어민 수준은커녕 ‘억수로’ 진한 경상도 억양의 소유자인 선생님은 ‘아이 엠 톰(I am Tom, 나는 톰이야)’ ‘유 아 제인(You are Jane, 너는 제인이지)’으로 시작되는 교과서를 다짜고짜 달달 외우게 하셨다. 이런 무식한 학습법이 있느냐며 툴툴댔지만 그렇게 웅얼웅얼하다 영어랑 친해졌고, 친해진 김에 대학도 영문과에 들어갔고, 지금도 주로 영어로 된 국제 뉴스를 다루는 일을 맡고 있으니 내겐 먹고살 길을 열어 주신 은인이 아닌가.
직장 상사도 마찬가지다. 『미생』의 오 과장과 김 대리뿐 아니라 밉살스러운 마 부장도 스승이 될 수 있단 얘기다. 기자 초년병 시절,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내게 “무슨 여자가 부끄럼도 없이 밥을 그리 많이 먹느냐?”고 타박하던 모 부장. 울컥하는 마음에 “아줌마, 여기 공깃밥 하나 더 추가요”를 외친 뒤 꾸역꾸역 그 밥마저 다 먹어 치웠다. 그걸론 분이 덜 풀려 밥 많이 먹는 여자가 일도 더 잘한다는 걸 보여 주려고 기를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성의 취업과 승진을 가로막는 이른바 ‘유리천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단단하다는 한국에서 26년째 한 직장을 무탈하게 다니는 비결이 뭐겠나. 다 그때 품은 오기 덕분이라 여긴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더니 과연 그렇다. 공자님이 어디 괜한 말씀 하실 분인가. 지금 당신을 많이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덕분에 인격 수양 잘하고 있다”며 외려 고마워할 일이다. 내친김에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준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당신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 있노라고.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