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15-7-22
섬진강을 따라 걷다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중 마음을 끌었던 것은 구례군 토지면에 위치한 낙안군수 류이주의 집 ‘운조루(雲鳥樓)’다. ‘구름 속의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는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올 줄 아네’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는 설도 있다. 운조루의 뒤는 지리산, 앞은 너른 들판과 그 너머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현재는 70여칸이 남았지만 지을 당시만 해도 99칸으로 누가 봐도 부유한 군수의 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운조루가 아름다운 것은 풍수지리상으로 완벽한 위치나 빼어난 외관 때문이 아니다. 집안 곳곳에 숨어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우선 운조루의 굴뚝은 매우 낮다. 밥 짓는 연기로 인해 어려운 서민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아예 그 높이를 낮춘 것이다.
무엇보다 운조루를 빛나게 하는 것은 ‘他人能解(타인능해)’라고 씌어 있는 뒤주다. ‘누구든 뒤주를 열고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으로, 언제나 가득 채워놓고는 흉년으로 그해 수확이 없거나 굶주린 마을 사람이 가져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뒤주로 가는 길이 눈에 잘 띄지 않아 내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뒤주까지 갈 수 있게 해뒀는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류이주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다.
동학, 여순사건, 6·25전쟁 등 수많은 민란과 전쟁을 치렀지만 운조루만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타인능해’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운조루의 도움을 받고 그곳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섬진강 따라 걷기를 20일째, 몸과 마음이 지쳐 원망만 가득했을 때 운조루를 만났다. 그 옛날 ‘누구나 열 수 있다’고 말하던 사람의 집에서 잠시 멍히 앉아 있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위인이 있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지금은 찾아보기 드문 인물이라 안타까워해야 할까. 세월의 결과 함께 낡고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간직한 운조루에 앉아 ‘타인능해’를 생각해본다.
곽효정(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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