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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집사 변호사'의 배후는 누구인가

바람아님 2015. 7. 23. 09:02
중앙일보 2015-7-23

얼마 전 신참 변호사 A씨(여·변시 4회)는 한 중견 로펌의 채용공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을 하던 로펌 대표변호사는 다짜고짜 A씨를 데리고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중요한 계약을 체결하러 구치소에 접견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A씨가 접견실에서 마주 앉은 사람은 이 로펌 의뢰인으로 구치소에 수감 중인 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제야 A씨는 깨달았다. 일종의 외모 면접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요즘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선 ‘집사(執事) 변호사’ 논란이 한창이다. 돈 많은 수감자들이 답답한 감방에서 나와 상대적으로 쾌적한 접견실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접견용 변호사’를 찾는 일이 늘면서다. 21일 서울구치소가 변호인 선임계를 내지 않은 채 한 달에 수백 차례씩 구치소 접견을 해온 변호사 10명에 대해 대한변협에 징계를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변협은 해당 변호사들을 품위 손상 등으로 징계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백민정</br>사회부문 기자
백민정/사회부문 기자

변협에 따르면 해당 변호사들은 “로펌 대표의 지시나 의뢰인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주 접견을 가게 됐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서울구치소가 징계를 요청한 변호사들은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30대가 대부분이었다. 이 중 6명은 여성 변호사였다.

‘집사 변호사’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호사 접견권(接見權)의 취지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데 있다. 헌법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변호사 접견권은 수사기관에 맞서 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이런 소중한 권리를 일부 수감자의 말동무나 심부름을 하는 데 악용한다는 것은 변호사의 품위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이러한 일탈에 가담한 변호사들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더 큰 비판을 받아야 할 이들은 ‘사회 초년생’ 변호사를 집사 변호사로 활용하는 일부 로펌 대표와 중견 변호사들이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엔 신참 변호사를 접견 전문으로 고용하려는 로펌·법률사무소 블랙리스트까지 돌고 있다. 구치소 접견을 자주 간다는 B 변호사는 최근 동료에게 “의뢰인이 ‘짧은 치마를 입고 오라’고 할 때는 자괴감도 들지만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데 어떻게 그만두느냐”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변협은 해당 변호사들에 대한 경고 조치나 징계에 머물러선 안 된다. 변호사 취업난 속에서 후배 변호사들에게 ‘집사’라는 낙인이 찍히게 만드는 일부 로펌과 중견 변호사들의 비뚤어진 행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변호사 사회의 자정은 멀고 먼 일일 것이다.


백민정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