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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건국의 아버지' 홀대한 나라 치고 끝이 좋은 경우 난 못봤소

바람아님 2015. 7. 27. 09:08

조선일보 : 2015.07.25

[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건국
형용사와 명사가 충돌하는 것을 좋아한다. '네모난 원' 같은 형용모순과는 좀 다르다. 형용모순은 서로 반대되는, 원칙상 말이 안 되는 단어의 조합이지만 충돌은 서로 스며들어 말맛을 내고 개념을 확장시킨다.

다산 정약용을 이야기할 때 소생은 종종 '천재적인 반동(反動)'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철저하게 긍정한 인물이다. 조선이라는 가혹한 노예제 사회를 그는 단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다. 그 노예제의 기틀을 단단히 하기 위해 그는 '목민심서'를 썼다. 좀 야박하게 말하자면 '노예를 대하는 현명한 주인의 자세'가 책의 주제다. 주인은 주인답게, 노예는 노예답게, 기생은 기생답게, 향리는 향리답게 각자 자기 있을 곳에 박혀 있는 것이 지고의 아름다움이라고 그는 믿었다. 만인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자신이 믿었던 천주교와는 달라도 참 많이 다른 세계관이다.

어느 정치인이 박정희 전(前) 대통령을 '위대한 독재자'라고 호칭한 적이 있다. 누가 정치인 아니랄까 봐 참으로 교묘한 발언이다. 싫어하는 쪽에서는 '독재자'라는 타이틀을 붙여 만족했을 것이고 좋아하는 쪽에서는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얻어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조차 이승만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완고하다. "그 사람,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끝난 인물 아니에요?" 되묻는다. 역사적인 평가가 끝났다니 이 무슨 겸허하지 못한 발언인가. 기원전 3~2세기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벌어진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몇 세기가 지나서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맞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서야 그 진정한 의미와 성격이 명확해졌다.

서양사만 그런 게 아니다. 가장 치욕적인 패전이었던 병자호란에 대해 객관적인 진단이 나온 것은 무려 100년 후다. 조선 후기 문인이었던 안석경은 문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랑캐(청나라)도 천명을 받으면 주인이 될 수 있다. 조선 또한 오랑캐인데 오랑캐 출신 황제를 섬기는 것이 뭐가 문제냐. 명(明)은 조선에 가혹했는데 청(淸)은 조선에 관대했고 그러니 이제 정묘·병자호란의 원한은 잊어버릴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기준과 평가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상할 정도로 예외다.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호는 '우남'이 아니라 '독재자'다. 과(過)로 공(功)을 덮은 게 아니다. 4·19가 위대해지기 위해 이승만은 더 낮아져야 했다.

싫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은 다르다.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은 이 싫은 것을 옳지 않은 것과 착각한다. 역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 무례다.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성공 벨트는 싫어할 수는 있어도 그 방향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다.

어느 나라나 건국일이 있고 건국 대통령이 있다. 심지어 건국의 아버지가 다섯 명이나 되는 나라도 있다. 이 '어느 나라나'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나라의 끝이 좋았던 경우를 소생은 아직 보지 못했다. 먼 훗날 세계는 대한민국을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지력이 떨어지는 국민이라도 지도자를 잘 만나면 잠시 잠깐은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던' 나라.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