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4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안보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모여 있다. 히비야 공원은 1919년 2·8 독립선언 때 체포되지 않은 한국인 유학생이 같은 달 12일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당시 선언에 참가했던 최승만(1897∼1985)은 선언 직후 '학생들이 형사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강제로 붙들려가는 광경도 어제 일 같이 눈에 선하다'고 1968년 회고했다.(극웅필경, 1970년 발행)
3·1 운동의 기폭제로 평가받은 2·8 독립선언이 낭독됐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때 불타 없어졌다.
당시 일본 신문은 '조선학생 대검거'(도쿄아사히신문, 법률신문), '선인(鮮人, 조선인) 600명 집합해'(도쿄니치니치신문) 등의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도쿄 간다(神田)구 니시오가와마치(西小川町)2-5'라고 회관이 있던 장소를 지목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 장소가 현재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 니시간다(西神田) 3초메(丁目) 3번지'라고 안내하고 있다.
◇주소 정보 불충분…장소 특정 어려워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옛 주소를 토대로 2·8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역사의 현장을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회관이 있던 곳을 명확하게 찾지 못했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주소 체계가 대폭 변했기 때문에 1919년의 주소를 현재의 주소로 파악하는 작업도 간단하지 않았다. 관할 행정기관인 지요다구청과 토지대장을 관리하는 법무국에도 1919년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요다구청에서 확인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1934년 작성된 신구(新舊) 주소대조표였고 법무국에서는 1929년 이후 토지대장만 확인이 가능했다.
간토대지진과 전쟁을 겪는 동안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차선책으로 1919년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지도를 비교해 위치 특정을 시도해 봤다. 우선 1930년을 전후로 회관 주소지를 가로지르는 꽤 큰 길이 생겼고, 회관 주소지 토지는 중간에 7개 정도의 필지로 나뉘었다가 현재는 몇 개의 큰 덩어리로 재편됐다.
남아 있는 행정구역 변동 자료와 지도를 토대로 당시 회관 주소지의 대략적인 현재 위치를 짐작해봤다.
그 결과 지요다구 니시간다 3초메 3번지·5번지·8번지와 이 구역 중간을 지나는 도로 일부가 회관의 주소지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됐다.
현재 여기에는 사무실이 가득한 고층 건물, 주택, 아파트, 상업용 건물 등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중간에 왕복 5개 차로가 있는 도로가 관통한다. 그러나 당시 회관 규모가 이 정도로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재일본한국YMCA 내에 있는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회관의 면적은 토지 기준으로 130평, 건물 넓이 74평의 서양식 2층 목조 건물이었다.
지요다구가 보관한 1912년 지도를 보면 회관 주소지의 토지 면적은 1천799평(약 5천947㎡)으로 회관 토지 면적의 약 14배이며 서울광장 잔디 면적(6천449㎡)과 비슷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당시 주소지에는 회관 외에 여러 건물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가운데 어느 지점에 회관이 있었는지가 파악되지 않은 셈이며 알려진 과거 주소만으로 그 위치를 찾기 어렵다.
다즈케 가즈히사(田附和久) 2·8 독립선언기념자료실장은 올해 초 연합뉴스와 함께 일대를 방문했을 때 니시간다 3초메 3번지 인근 골목 부근에 회관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즈케 실장은 '옆으로는 정면에 센슈(專修)대학이, 오른쪽에 강이 있었다'는 증언과 관련 사진, 지도, 영상 등을 토대로 추정한 것이며 회관이 확실하게 어디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포기했다"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거론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측은 현재 안내 중인 회관 위치가 어떤 방식으로 특정된 것인지조차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시간과 예산이 제약된 가운데 외부에 위탁해 독립운동 사적지를 일괄 조사한 것이라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며 일본 내 독립운동 사적지를 곧 재조사하겠다고 밝혔다.
1919년 회관이 있던 장소에서 멀리 않은 곳에 있는 재일본한국YMCA에는 2·8 독립선언기념자료실이 있어 선언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 등 당시 상황을 그나마 소개하고 있다.
◇ 독립만세운동 히비야 공원…도심 속 저항의 상징
도쿄에는 1919년 독립운동이 이뤄진 또 하나의 장소가 있다.
2·8 독립선언 때 체포되지 않은 한국인 유학생이 같은 달 12일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 바로 히비야(日比谷) 공원이다.
현재 히비야 공원의 북쪽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일왕의 거처(皇居)가 있고 서쪽에는 경찰청, 검찰청, 외무성, 국회, 총리관저 등이 일본의 국가 핵심 기관이 밀집해 있다.
비록 독립운동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지만 1919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히비야 공원은 오늘날도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잡았다.
최근 수년 사이 히비야 공원은 원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자주 집결하는 장소가 됐다. 7월 14일 찾은 히비야 공원에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추진하는 안보 관련법 제·개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주최 측 추산 약 2만 명이 결집했고 야외 음악당에 다 들어가지 못한 시위대는 히비야 도서관 인근에서 깃발과 팻말 등을 들고 '전쟁 반대', '전쟁법안 폐안' 등의 구호를 외쳤다. (취재보조: 이와이 리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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