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8.11
국가 상징 거리이자 수도 중심부
장기 계획 없이 만들고 … 없애고 …
“역사 바로잡기” “역사 파괴” 논란
광장 또 확장 추진 … 변화 기로에
“중앙도로에서 왕궁까지 60야드(약 55m) 너비의 도로가 있다. 이 도로는 장애물이 없는 유일한 길이다.”
영국 출신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구한말 조선을 답사했던 경험을 담은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광화문 앞 공간을 묘사한 대목이다. ‘육조대로’로 불렸던 이곳은 왕이 행차하는 어가(禦街)이자 길 옆으로 의정부와 육조가 늘어서 있던 조선의 중심거리였다. 500여 년간 조선왕조의 왕도 정치를 구현한 곳이었지만 일제 식민지배가 시작된 뒤 제국주의적 권위주의가 표출되는 공간으로 변질됐다. 1926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앞에 세워졌으며 이듬해 광화문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일제는 45년 광복 때까지 이 공간을 ‘광화문통’이라 부르며 각종 박람회를 열어 식민통치 성과를 선전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그로부터 70년. 광복 후 세종로로 이름이 바뀐 광화문 앞 공간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국가의 상징거리이자 수도의 중심부인 이 역사적 공간은 시민의 뜻과는 별개로 정치권력의 교체에 따라 변형을 거듭하며 현대사의 부침을 함께 겪었다.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세종로는 서울의 공간구조 속에서 중심의 힘을 지닌 전통적인 ‘권력의 공간(place of power)’”이라며 “장기적 계획 없이 권력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그때그때 과거의 흔적을 지우거나 새로운 치적을 덧칠해왔다”고 말했다.
세종로가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때다. 66년 세종로를 폭 64m 도로로 확장한 박 전 대통령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에게 광화문 복원을 지시했다. 2년여간 진행된 공사 끝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된 길이 88.6m, 높이 15.4m, 무게 7000t의 거대한 광화문이 세종로의 시작점에 세워졌다. 비슷한 시기 이순신 장군 동상도 제작됐다. 박 전 대통령이 “세종로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광화문 복원과 이순신 동상 건립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정권이 지향하는 목표를 충실하게 구현하기 위한 상징물이었다. ▶목재로 지어졌던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한 점 ▶세종로로 이름이 붙여진 곳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점 등에는 권력의 강한 의지가 반영됐다. 하상복 목포대 교수는 “철근과 콘크리트라는 산업화의 주 재료로 광화문을 복원하고,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운 것은 정권의 이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고 풀이했다.
세종로의 풍경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달라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광복 50주년이던 95년 8월 15일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됐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것이다. 361억원이라는 철거비용 문제 등으로 반대도 있었지만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를 강행했다. 이상구 경기대 교수는 “부끄럽고 뼈 아픈 역사이지만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은 문제”라며 “참담함을 상기하면서 배울 점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68년 복원했던 광화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때인 2005년 2차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거센 논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광화문이 원래 위치에서 14.5m 뒤에 세워지는 등 복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로 쓴 현판도 정조의 글자로 된 한자 현판으로 바꿀 것”이라고 밝히면서다. 한나라당 쪽에서 “승자에 의한 역사파괴”라며 논쟁의 불을 지폈다.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구실로 박정희 시대 지우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문화재청이 경복궁 중건 당시 현판을 쓴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하기로 해 논란은 일단락됐다. 광화문은 2010년 원래 있던 자리에 목재로 복원됐다.
2006년 취임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종로 한가운데에 광장을 만들었다.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는 이유에서였다. 16차로였던 차로를 10차로로 줄이고 길쭉한 모양의 광장을 조성했다. 세종대왕 동상을 만들어 기존의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설치했다. 2009년 8월 개장으로 세종로는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하지만 광화문과 세종로는 6년 만에 또 다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박원순 시장이 세종문화회관 앞쪽 도로로 광장을 확장하고 나머지 도로를 대중교통만 다닐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국무조정실이 실시한 ‘광복 70주년 기념사업 국민제안’ 공모전에서 광화문 확장안이 탈락했으나 서울시는 올 하반기 ‘광화문포럼(가칭)’을 만들어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박민제·장혁진 기자
영국 출신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구한말 조선을 답사했던 경험을 담은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광화문 앞 공간을 묘사한 대목이다. ‘육조대로’로 불렸던 이곳은 왕이 행차하는 어가(禦街)이자 길 옆으로 의정부와 육조가 늘어서 있던 조선의 중심거리였다. 500여 년간 조선왕조의 왕도 정치를 구현한 곳이었지만 일제 식민지배가 시작된 뒤 제국주의적 권위주의가 표출되는 공간으로 변질됐다. 1926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앞에 세워졌으며 이듬해 광화문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일제는 45년 광복 때까지 이 공간을 ‘광화문통’이라 부르며 각종 박람회를 열어 식민통치 성과를 선전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그로부터 70년. 광복 후 세종로로 이름이 바뀐 광화문 앞 공간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국가의 상징거리이자 수도의 중심부인 이 역사적 공간은 시민의 뜻과는 별개로 정치권력의 교체에 따라 변형을 거듭하며 현대사의 부침을 함께 겪었다.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세종로는 서울의 공간구조 속에서 중심의 힘을 지닌 전통적인 ‘권력의 공간(place of power)’”이라며 “장기적 계획 없이 권력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그때그때 과거의 흔적을 지우거나 새로운 치적을 덧칠해왔다”고 말했다.
세종로가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때다. 66년 세종로를 폭 64m 도로로 확장한 박 전 대통령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에게 광화문 복원을 지시했다. 2년여간 진행된 공사 끝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된 길이 88.6m, 높이 15.4m, 무게 7000t의 거대한 광화문이 세종로의 시작점에 세워졌다. 비슷한 시기 이순신 장군 동상도 제작됐다. 박 전 대통령이 “세종로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광화문 복원과 이순신 동상 건립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정권이 지향하는 목표를 충실하게 구현하기 위한 상징물이었다. ▶목재로 지어졌던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한 점 ▶세종로로 이름이 붙여진 곳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점 등에는 권력의 강한 의지가 반영됐다. 하상복 목포대 교수는 “철근과 콘크리트라는 산업화의 주 재료로 광화문을 복원하고,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운 것은 정권의 이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고 풀이했다.
세종로의 풍경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달라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광복 50주년이던 95년 8월 15일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됐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것이다. 361억원이라는 철거비용 문제 등으로 반대도 있었지만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를 강행했다. 이상구 경기대 교수는 “부끄럽고 뼈 아픈 역사이지만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은 문제”라며 “참담함을 상기하면서 배울 점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68년 복원했던 광화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때인 2005년 2차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거센 논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광화문이 원래 위치에서 14.5m 뒤에 세워지는 등 복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로 쓴 현판도 정조의 글자로 된 한자 현판으로 바꿀 것”이라고 밝히면서다. 한나라당 쪽에서 “승자에 의한 역사파괴”라며 논쟁의 불을 지폈다.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구실로 박정희 시대 지우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문화재청이 경복궁 중건 당시 현판을 쓴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하기로 해 논란은 일단락됐다. 광화문은 2010년 원래 있던 자리에 목재로 복원됐다.
2006년 취임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종로 한가운데에 광장을 만들었다.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는 이유에서였다. 16차로였던 차로를 10차로로 줄이고 길쭉한 모양의 광장을 조성했다. 세종대왕 동상을 만들어 기존의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설치했다. 2009년 8월 개장으로 세종로는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하지만 광화문과 세종로는 6년 만에 또 다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박원순 시장이 세종문화회관 앞쪽 도로로 광장을 확장하고 나머지 도로를 대중교통만 다닐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국무조정실이 실시한 ‘광복 70주년 기념사업 국민제안’ 공모전에서 광화문 확장안이 탈락했으나 서울시는 올 하반기 ‘광화문포럼(가칭)’을 만들어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박민제·장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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