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5.0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8> 위안부와 역사왜곡
위안부 모집 군속들 마을 다니며 … “여자들도 돈 벌 수 있다” 감언이설
구사일생 돌아와 가정 꾸린 이들 상처 다시 꺼내면 2중·3중 고통 우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싫건 좋건 연결돼 있다. 광복 70년인 올해, 일본 식민제국주의 치하의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와 경제·사회·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21세기 지구촌에서 일본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일본은 역사의 아픔을 준 한국·중국 등 이웃 나라들을 이해하고 서로 공존·공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만 한다. 이제 살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몇 분 안 된다. 그분들이 안심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
과거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너무 대조된다. 메르켈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영원히 반성하고 사죄한다. 위안부 문제는 홀로코스트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일본은 반드시 이 과거를 기억하고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니까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2001년은 연초부터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두고 갈등이 격화됐다. 일본에서 한일병합(倂合)을 정당화하고 위안부 내용을 삭제하는 등 왜곡된 과거사를 담은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정식 교과서로 채택될 상황이었다. 여기에 우리 여야 의원들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시민단체는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시위와 집회를 잇따라 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언론은 줄곧 무성의한 태도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3월 2일자 사설에서 ‘일본은 사상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나라다’는 제목 아래 ‘정신대(挺身隊)는 전쟁 시 근로를 위해 동원된 것’이라며 중국과 한국이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위안부가 강제 동원됐다는 사실(史實)을 ‘뎃치아게루(でっち上げる·꾸며낸 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자민련 명예총재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나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마침 일본에 체류 중이던 3월 7일 한·일의원연맹 회장 자격으로 류흥수(연맹 간사장·한나라당)·장재식(부회장·자민련)·이윤수(운영위원장·새천년민주당) 의원과 함께 요미우리신문사 본사로 쳐들어갔다.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2005년부터 회장) 사장 겸 주필에게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어이, 쓰네오상. 이럴 수가 있어? 당신 나이가 나하고 같으니까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글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이 글 누가 썼어? 이거 쓴 논설위원들 다 불러 와라.”
와타나베는 나와 동갑내기로 오랜 일본 친구다. 1961년 내가 35세 때 이케다 총리를 만나기 위해 한·일 회담 밀사로 일본을 찾았을 때 그는 정치부 기자로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실을 출입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일본 문예춘추 9월호에 쓴 기고에서 나를 “한국 경제의 폭발적 성장을 실현시킨 공로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건 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 있는 나의 중·고교 시절, 고향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일제시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누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나의 호통에 와타나베 회장은 물론 논설위원 중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그들은 위안부를 ‘가난해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라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친김에 일본 언론사들을 한 바퀴 돌았다. 이튿날은 아사히신문을 찾아 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 상태를 자세히 알렸고, 그 다음 날은 산케이를 찾아 보도 태도에 항의했다.
그간 일본의 전중(戰中)세대,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해 왔다. 일본 아사히 신문 종군기자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 쓴 『제국육군의 최후』(1960·문예춘추사)라는 책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했다.
이 책에 따르면 손재주가 좀 있어 보이는 여자는 공장으로 데려갔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는 중국 대륙으로 끌고 가 군대 위안부로 만들었다. 일본 군대가 만주로 가면 위안부도 만주로, 월남으로 가면 월남으로 데려갔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각 섬으로 흩어졌다. 용산에 진주하던 일본군 20사단은 수송선을 타고 뉴기니로 향했는데, 미국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배 절반이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그때 배에 함께 탔던 종군위안부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토의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아마도 누군가가 위안부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위안부 얘기를 꺼내기 힘들었던 우리 사회 분위기는 70년대도 비슷했다. 내가 국무총리를 하던 시절이다. 1971년 5월~72년 3월까지 10개월 동안 기존 한·일 협정의 청구권과 별도로 일제시대 민간인 피해자 보상을 위해 ‘대일(對日) 민간 청구권 신고’ 창구를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총 14만여 건, 액수로는 약 40억원의 신고가 접수됐다. 그런데 위안부 피해가 신고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신고의 70%는 은행 예금이었고 그 외에 국채·생명보험·우편저금·회사채·전쟁사망자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그분들이 자신을 드러내 일본 군국주의의 폐해를 고발하고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가치를 호소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희생과 헌신이 아닐 수 없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其他 > 백선엽·김종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일 협정 조인 다음날 박정희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잡아야”…최근 한·일 관계 악화 지켜본 JP “대일 외교, 냉철하고 일관돼야” (0) | 2015.08.19 |
---|---|
“돌멩이 맞더라도 직접 설득” 들끓는 캠퍼스에 들어간 JP…“한국, 대륙 끝 맹장 신세 … 일본을 딛고 태평양으로 나가자” (0) | 2015.08.18 |
일본 실력자 고노 “독도, 미해결의 해결 상태로 둬야” (0) | 2015.08.16 |
JP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두견새 함께 울려보자" … 일본 고사 꺼내자 오히라는 속내를 털어놨다 (0) | 2015.08.15 |
나라 일으킬 밑천이 필요했다 … 도쿄로 날아간 JP “한국 분단은 일본 책임 … 고통 비용 내라” 이케다와 담판 (0) | 2015.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