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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정 조인 다음날 박정희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잡아야”…최근 한·일 관계 악화 지켜본 JP “대일 외교, 냉철하고 일관돼야”

바람아님 2015. 8. 19. 00:54

[중앙일보] 입력 2015.05.1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30> 수교 50년 한·일 관계 미래는

1962년 11월 13일 김종필 중정부장(JP·왼쪽)이 서울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 있다. JP는 전날 도쿄에서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 대일 청구권 자금규모(6억 달러+α)를 합의하고 이튿날 귀국, 바로 박 의장을 찾아가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은 JP의 청구권 자금 타결을 계기로 속도가 빨라졌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설]

한·일 회담에 임하는 내 마음은 1961년 혁명 때 목숨을 걸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게는 제2의 혁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게 혁명의 기획자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할 일이었다. 10년간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게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과업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자금 밑천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 중공(中共)은 잠자는 거인에서 ‘포효하는 사자’로 깨어나고 있었다. 중공의 국제무대 등장으로 인한 우리의 외교적 고립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예방해야 했다. 내가 한·일 회담에 뛰어들게 된 배경에는 이런 국제 정세적 변화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후 4년을 회상해 보니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담, 오히라 외상과 대일 청구권 협상, 최종 타결을 위한 막후 조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반대시위, 대학 캠퍼스 순회 토론, 6·3 비상계엄 선포, 구름처럼 떠돌던 2차 외유 장면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갔다.

65년 6월 23일 오후 8시. 도쿄에서 한·일 수교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라디오와 TV로 ‘한·일 국교 정상화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소공동, 지금의 조선호텔 주차장 자리에 있던 공화당 당사에서 박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박 대통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낭독한 담화는 우여곡절 끝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결론 내는 증좌(證左)였다.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우리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필요하면 원수와도 손을 잡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다. 반일(反日)보다 어려운 게 용일(用日)이란 얘기는 나와 박 대통령이 종종 나눴던 대화 주제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자주정신과 주체의식을 호소했다. 개인 관계든 국가 관계든 나를 지켜내는 건 스스로의 의지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나는 국민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극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의식이 어느 정도 건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62년 이케다 총리와 만날 때 “미국의 원자탄 투하는 일본이 자초한 것이다. 만일 원자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일본 지도자들은 끝까지 저항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북쪽에선 소련군이, 남쪽에선 미군이 진주해 일본 국토가 양단됐을 것이다. 일본은 원자탄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했다. 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경고 발언을 할 때는 이케다와의 만남이 생각났다. 박 대통령은 이어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들이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국민들의 심정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거나 결코 소홀히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대일 불신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대일 청구권 자금(8억 달러)을 받아 종합제철소를 만들고 싶어 했다. 경제개발에 집중해 기업과 소득, 일자리를 늘리고 북한과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에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참여국으로 일본한테 정식으로 ‘전쟁 피해 배상금’을 받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미얀마·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등이다. 이들 나라는 2억~5억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 국민 개인에게 돈을 나눠주거나 리조트 같은 소비시설을 건설하는 데 자금을 쓰는 바람에 국가 경제의 도약 기회를 날려버렸다. 지도자의 애국심과 용기, 앞을 내다보는 능력, 선견지명과 발전 전략이 한국과 다른 신생국의 운명을 가른 한 요인이었다고 본다.

1964년 3월 28일 일본에서 한·일 회담 타결을 위해 막후 지원 활동을 벌이다 돌아온 김종필 공화당 의장(가운데). 김포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귀국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 대통령은 나를 믿었다. 대일 청구권 협상 같은 건 일체 다 내게 맡겼다. 집권세력 내부엔 한·일 회담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문제만 생기면 그것을 빌미로 나를 제거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공화당 내 이른바 4인 체제, 이북 출신 군 수뇌부가 그런 성향을 보였다. 6·3사태 후 외유를 떠날 때도 박 대통령은 ‘너 나가. 방해되니까 나가 있어’ 같은 식으로 얘기한 적이 없다. 대통령은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 하는 식으로 내 의견을 물었고 나는 “대통령께 짐이 된다면 내가 나가겠습니다”고 스스로 결정했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50년이 흘렀다. 지금의 양국 관계는 어느 때보다 좋지 않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전후 세대 지도자들의 역사관이 퇴행적이고 일본 국민들도 30년대 군국주의 시대처럼 지도자들의 생각을 이의 없이 추종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의 대일외교는 냉철하고 강인하며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들도 이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독도는 일본이 심심하면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자료로 삼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일일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의 그런 반응을 이용해 독도를 분쟁 대상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일본이 묘한 소리를 계속할 때 한 번씩 크게 혼내주는 정도면 된다. 독도는 우리가 실효(實效)지배를 하고 있으므로 일본이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일본에 사과와 응분의 조치를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기피하거나 꾸며서 대응하는 상태다. 현재 일본 정부의 속성상 이런 상황 이상의 변화가 나오긴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일본의 폭력성과 인권유린 문제를 계속 제기할 필요는 있다.

 영토와 과거사 이외의 여타 외교 이슈에서 한·일 정부는 보편적인 국제 관계의 룰에 따라 건설적 관계를 맺어 가야 한다. 양국 간 정상회담은 추진해야 하지만 회담을 하더라도 당장 발전된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게 현실적일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이웃 나라 일본과 사이가 계속 나쁠 경우 한국에 유리할 게 없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주장할 건 주장하고 덮어둘 것은 덮어두면서 다음 단계를 생각해 신중하고 정당하게 대일외교를 펴는 태도가 요구된다. 정부 간엔 얼굴을 붉히며 대립하고 있을 때에도 국민끼리는 만나서 교류하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이어 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외교를 잘해야 존립하는 나라다. 서쪽에 중국, 북쪽에 러시아, 동쪽과 남쪽에 일본, 그 너머 미국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북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한국의 생존과 번영은 외교 그 자체에 달려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일 수교 50년이 되는 올해가 양국 정부와 국민의 성숙되고 발전된 모습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소사전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 제2차 세계대전을 외교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연합국 48개국과 패전한 일본이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은 평화협정. 미국이 주도했다. 식민지 상태였던 한국은 일본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약에 초대받지 못했다. 조약은 한·일 관계 정상화 문제를 양국이 따로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협정에 따라 대부분의 연합국은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포기했다. 하지만 필리핀 등 아시아 4개국은 ‘전쟁 배상금’을 공식적으로 받은 뒤 협정에 서명했다. 한국은 원천적으로 배상금을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