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5.0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9> 한·일 회담과 6·3사태
도쿄 숙소 쳐들어온 조총련 대학생
일본말로 “나라 파는 짓 중단” 외쳐
JP “모국어 모르면서 뭔 애국” 호통
1971년 8월 25일 김종필(JP·가운데) 총리가 교련 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공릉동 서울공대 캠퍼스를 찾았다. 당시 정부는 71년부터 교련교육을 주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리고 군생활을 경험하는 집체교육을 받게 했다. 이에 대학가에서 ‘학원 병영화’ 반대를 주장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JP는 집권당 대표였던 63년 말부터 데모의 진원지인 대학 캠퍼스를 찾아다녔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64년 3월 20일 나는 공화당 의장 신분으로 다시 도쿄를 방문했다. 61년 한·일 회담 재개를 위해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담을 한 이래 일곱 번째 일본 방문이었다. 밤 9시가 넘어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는데 일본 사회당계 전학련(全學聯) 소속 학생 200여 명이 나타나 나의 방일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느라 시끄러웠다. 이튿날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 23일 오히라 외상, 24일 이케다 총리를 각각 만나 4월 초에 양국 외무회담을 열어 회담을 마무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울 상황은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3월 24일 서울대 교정에선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학생 3000여 명이 모여 소위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벌였다. ‘굴욕적 한·일 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도쿄에 체류 중인 매국 정상배(政商輩)는 즉각 귀국하라’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학생들은 나에게 ‘나라 팔아먹는 제2의 이완용이다’라는 등 별의별 말을 다했다.
25일 오후 내가 묵고 있는 도쿄 힐튼호텔도 소란스러웠다. 일본 경시청 경찰들이 방으로 올라왔다. 조총련계 대학생 400여 명이 쳐들어와 “매국노는 물러가라”며 시위를 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했다. 경찰은 단도를 갖고 있는 놈들이 여럿이라고 했다. 서울의 학생데모를 지원하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학생 대표 20~30명을 뽑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들 중 한 학생이 자리에 앉자마자 일본말로 “매판자본을 들여다가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고 하는 교섭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 당장 그만두라”고 주장했다. 게이오(慶應)와 와세다(早稻田)대에 다니는 엘리트들이었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한참 그들의 주장을 듣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너희들은 나더러 매국노라고 떠드는데 조국을 사랑한다면서 모국어도 몰라 일본어로 내게 항의하느냐”고 일갈했다.
나는 이어 “조국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너희들은 잘 모른다.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들어와서 보고 느끼게 만들어 주마. 너희와 나는 입장이 다르다. 나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혁명을 했다. 그 일원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내 조국이 극빈 상태를 탈피하고 세계무대로 뛰어나갈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는 거다.” 대표들은 내 서슬에 질렸는지, 내 호소가 먹혔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려갔다. 잠시 뒤에 보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과 대표들이 서로 엉켜서 주먹질을 하고 야단이었다. “항의하러 간 놈들이 되레 세뇌당하고 왔다”는 얘기였다.
이튿날 오전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내린 김포 비행장엔 어떻게 된 일인지 조용했다. 데모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때 나의 귀국성명 요지는 이랬다. “많은 우국(憂國) 학생들이 과거에 우리가 받은 모든 수치를 상기하고 궐기한 충정에 깊이 감명하고 있다. 나는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기회 있는 대로 만나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생각이다….” 주위에서는 내가 대학 캠퍼스에 가면 계란은 물론 돌멩이도 맞을 수 있다고 말렸다. 하지만 나는 그때 ‘계란을 던지면 맞자. 돌멩이를 던지면 맞자. 그래도 내가 가서 설득해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 넉 달 전인 63년 11월에도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들에게 5·16 혁명의 정당성과 한·일 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었다.
1963년 6월 3일 서울 시내에 1만500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 박정희 대통령 하야 등을 요구하는 한·일 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박대통령은 결국 이날 오후 8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중앙포토]
64년 4월 9일 당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서울대 사범대학에 갔다. 내 모교인 사범대 학생회가 주최한 대토론회에 참석했다. 강당에 모인 3000여 명의 학생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를 생각해 봐라. 서쪽에는 중공(中共)이, 북쪽에는 소련이 막아서 대륙으로는 갈 데가 없다. 그들은 막강한 국력을 갖고 있는 공산국가다. 그쪽으론 우리가 나아갈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대륙의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신세가 아니냐. 남쪽은 3000㎞ 이상의 섬들이 늘어서 있다. 일본 제도(諸島)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일본을 디딤돌로 해서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지중해로 나아가야 한다. 일본이 밉더라도 우리가 살길을 열어나가려면 국교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돈을 빨리 가져다가 경제개발의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 이게 안 된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 쓸모없는 맹장 신세로 끝나고 만다. ”
또 “청구권에 대해 의혹을 고의로 자아내는 분들이 있다. 외교는 타협이다. 타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누구인들 이 나라의 생(生)을 얻고 피를 이어받고 민족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 푼이라도 정정당당하게 받으려고 노력하면 했지 양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일본 지도자들과 만나 저자세(低姿勢)를 취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설득했다.
나의 얘기에 적대적이었던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누그러졌다. 학생들은 옳다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후로도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숙명여대 등을 다 돌아다니며 학생들과 대화하고 설득했다. 숙명여대는 아내가 다녔던 학교다. 내 연설에 박수뿐 아니라 “형부가 왔다”며 몰려들어 내 옷을 잡아당겨 단추가 떨어져 나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학생들은 다음날이면 또 거리로 나가 “한·일 회담으로 나라 팔아먹는 놈 내쫓아라”며 시위를 했다. 혹자는 이런 시위가 정부의 대일 협상에 도움을 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그 당시 반대하며 거리를 누비던 학생들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나를 만나면 “조국 근대화의 전략과 열정을 알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여러분의 애국심과 정의감을 알고 있었다”고 말해준다.
나는 여권 내 반대세력의 표적이기도 했다. 청와대, 행정부, 국회는 물론 공화당 안에서 박 대통령 친위세력을 자처하는 그룹들이 나를 거세하려 했다. 군부에서도 혁명 시기 중령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내게 반감(反感)을 품은 장군 출신이 많았다. 당시 군 수뇌부가 집단으로 나의 퇴진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JP를 퇴진시켜 해외로 내보내야 거리의 반대시위가 그칠 것이라는 게 그들의 명분이었다.
6월 3일은 아침부터 서울시내 18개교 대학생 1만5000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한·일 회담 반대를 외쳤다. 이들은 취임한 지 반년도 안 된 박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게 6·3사태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결심을 했다. 청와대에 올라가 박 대통령에게 “제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참 침묵하던 박 대통령이 “그래 한 번 더 나갔다 와”라고 말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간 것이 소위 ‘2차 외유’다. 6월 18일 아내와 함께 출국해 6개월 동안 세상을 구름처럼 돌아다녔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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