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6.0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41> 그림, 그리고 정치
잠시 정계 떠났던 68년 그림 시작
이마동·박광진 교수에게 필치 배워
처칠 ‘철의 장막’ 연설한 미국 대학
JP, 권력 꼬집는 ‘봉산탈춤’ 선물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아마추어적 유유자적(悠悠自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눈에 비치는 사물의 상(象)을 그저 재현해 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나에게 그림은 인생 여정(人生旅程)과 같다. 내 그림 곳곳에 지나온 세월의 격정과 고뇌가 녹아 있다.
내가 미국 대학에 보낸 그림이 두 점 있다. 하나는 1984년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에 보낸 ‘주먹(Fist·1984)’이라는 유화다. 2호(25.8×17.9㎝)짜리 조그만 화폭에 가득 내 주먹을 그려 넣었다. ‘힘을 수반하지 못한 정의는 무기력하고,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폭력일 뿐’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사람이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온다. 갓난아기의 손을 펴보면 손바닥에 손금을 따라 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다. 그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 나온 거다. 이건 바로 아기가 엄마 배 속을 힘겹게 빠져나오면서 살아야겠다는 본능적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사람은 슬플 때 주먹을 쥐고서 울고, 결의를 표명할 때에도 주먹을 쥔다. 이 주먹이 인생의 속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또 다른 그림은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대 전시관에 있는 ‘봉산탈춤’(116.8×91㎝·1977)이다. 66년 10월 나는 웨스트민스터대에서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200여 명을 수용하는 대강당에서 1시간 동안 ‘자유를 향한 아시아의 길’이란 제목으로 영어 강연을 했다. 웨스트민스터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 만인 46년 3월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1874~1965) 전 총리가 그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을 한 곳이다. 웨스트민스터대학은 처칠 연설 20주년을 기념해 나를 강연에 초청했다. 나는 처칠이 연설한 바로 그 강단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중국의 임어당(林語堂)에 이어 두 번째로 강연을 했다. “동서양은 죽(竹)의 장막을 제거하고 문화적으로 손을 잡지 않고서는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어렵다”는 게 나의 연설 요지였다. 웨스트민스터대에서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으니 한 작품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보내 준 게 ‘봉산탈춤’이다. 나는 그 그림에 대해 ‘과거 한국 사람들은 맨 얼굴로는 못하니 이런 탈을 쓰고 권세를 비판했다. 그림 속에는 권력을 향한 조용한 반항과 해학(諧謔), 그리고 위정자들에게 뉘우침을 요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설명해줬다. 지금 이 그림은 대학 전시실에 처칠 및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전 미국 대통령의 그림과 나란히 전시돼 있다.
나도 정계를 잠시 떠났던 68년 마흔두 살 때부터 그림을 시작했다. 부산과 제주도·경주·설악산·강릉 등지를 다니며 일요화가회 회원들과 그림을 그렸다. 물론 내가 처칠 흉내를 낸 것은 아니다. 당시 일요화가 회원들의 요청으로 명예회장이 되면서 ‘기왕이면 직접 그려볼까’ 하는 충동에 유화 붓을 들게 됐다. 어려서부터 비교적 취미가 다양해서 그림도 퍽 좋아했다. 하지만 중학 시절에 수채화를 그려본 후로는 붓을 잡아보지 못했다. 캔버스를 처음 대했을 때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다행히 화단의 거장(巨匠) 이마동(1906~80) 홍익대 교수나 박광진(80) 서울교대 교수의 지도로 몇 점을 그리는 동안 기초적인 필치를 익혔다.
68년 8월 경주 반월성에서 석빙고(石氷庫·53×45.5㎝·1968)를 그리고 있었다. 나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이마동·박광진 교수 등 쟁쟁한 선생들이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버스 한 대가 부근에 섰다. 수학여행을 온 이화여대생들이었다. 이들은 버스에서 내려 우리 일행 쪽으로 와 기웃거리더니 내 그림을 보고는 큰 소리로 품평을 했다. “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제일 형편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와 교수들이 같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나의 개인전이 기정사실로 신문지상에 보도돼 있는 것을 알고 문자 그대로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하는 수 없이 9월 하순에 신문회관 회랑에서 ‘한재민(旱災民) 구호 자선유화전’이란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의외로 협찬해주는 각계 유지가 많았다. 모두 16점의 그림이 팔려 500만원을 모았다. 당시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3만원이 좀 넘던 시절이었다. 행사비를 충당하고 남은 450만원 전액을 피해가 가장 심했던 전남 나주군 동강면 진천리 부락에 전달했다. 이후 그 부락에서는 이 돈으로 지붕을 개량하고 도정 공장도 마련했다. 또 논 1만 평을 구입해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아동들의 장학금을 마련했다. 이 부락은 그 후 내 호를 따 ‘운정(雲庭)마을’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내 그림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걸 하나 꼽으라면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꼽겠다. 78년 1월, 신문회관에서 열린 한·일 의원 합동 미술전시회에 출품한 30호(72.7×90.9㎝) 크기의 ‘한라산과 초가(草家)’(1977)라는 작품이다. 위로는 눈 덮인 한라산, 아래에는 제주 특유의 새끼줄 친 초가집과 유채꽃 핀 돌담을 그려넣었다. 여간해서는 칭찬을 모르는 박광진 화백이 “한라산의 모습을 잘 표출했다”며 후한 점수를 준 그림이다. 그는 나에게 “그림 그리는 기초는 안 배웠지만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평가해줬다.
그때 재미있는 일화도 하나 얘기해야겠다. 한라산을 그리다 생각해 보니 정상의 높이가 50m 모자란 2000m였다. 일행들에게 “1950m 정상에 돌을 50m 쌓아 2000m를 만들어보자”고 제의했다. 남한에도 2000m가 넘는 산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모두들 웃었다. 지리학에서는 돌을 아무리 자연스럽게 쌓아도 인공적인 높이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나의 대표적 일본 지인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97) 전 총리도 그림을 그렸다. 내가 한강 건너편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절두산 성지를 그린 그림(60.6×45.5㎝)을 나카소네에게 선물했다. 그는 보답으로 푸른 바탕에 가운데 흰색 물감으로 한 일 자를 그린 그림을 내게 줬다. “이게 뭐냐”는 내 질문에 그는 “태평양의 파도”라고 답했다.
2001년 나는 그동안 그려온 그림으로 탁상용 달력을 만들어 정계 인사와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내 생애 40여 점의 그림 중 이른 봄의 제주, 여름의 가야산, 가을과 겨울의 설악산 등 각 계절에 맞는 풍경화 12점을 골랐다. 달력 표지엔 ‘화심(畵心)… 순리를 거르지 않는 천심(天心)’이라고 썼다. 30대에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일으켰으며 순리의 정치를 찾고자 했다. 그런 마음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고대 그리스 현인들은 정치를 예술이라고 했다. 예술의 경지에까지 정치를 끌어올리려 했으니 옛 그리스 정치가들의 꿈이 얼마나 장하고 위대한가. 모든 예술이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듯 모든 정치가 진정 아름다움의 세계를 동경하고 개척해 놓는다면 그게 바로 이상향이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