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 짐을 풀고 3개월을 사는 동안 끝내 가지 않고 남겨둔 섬이 있다. 그 섬은 나의 숙소가 있는 리도에서 수상버스로 1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산 미켈레라는 섬인데, 흔히 ‘망자(亡者)들의 섬’으로 알려진 무덤 섬이다.
내가 살았던 리도는 토마스 만의 소설과 비스콘티의 동명(同名)의 영화로 유명한 ‘베네치아의 죽음’의 무대가 된 작은 섬으로, 최근에는 베니스 영화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리도와 본섬을 드나들며 망연히 산 미켈레 섬을 건너다보곤 했다.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수상버스의 뱃전에 서서 측백나무 우거진 무덤 섬을 건너다보노라면 속에서 이런 절박한 질문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산다는 건 뭐죠? 죽음은 또 뭐죠?”
멀리 집을 떠나온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더없이 외롭고 그리고 단순해져 있었다. 나는 날마다 내일은 꼭 무덤 섬에 가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날이 밝아오면 나는 그 섬에 가지 않았다. 오늘은 안개가 짙어서, 햇살이 눈부셔서, 비가 와서, 바람이 사나워서 무덤 섬에 가기가 두렵고 싫었다.
그곳은 기실 베네치아의 주요 관광 코스의 하나이기도 했다. 특히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랬다. 20세기 시인 중의 시인이라는 에즈라 L 파운드가 묻혀 있고, 소련 출신의 유대계 시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도 거기 묻혀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만 가면 오묘한 문학적 영감이 차올라 뜻밖에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미국 시인이지만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재 정부를 찬양했다 해서 수많은 질타와 함께 정신병원에 감금된 시인 아닌가. 그리고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조국 소련의 법정으로부터 반(反)소련의 기생충 시인으로 체포되어 정신병동에 감금된 시인이다. 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미국으로 망명한 후 모국어로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고, 강연을 하거나 여자들과 연애를 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섬을 나는 바라보기만 하고 끝내 발을 들여놓지 않고 베네치아에서의 삶을 거의 다 보내고 말았다. 미로와 수로, 유리와 가면, 곤돌라…. 그리고 르네상스 발상지의 문학사와 예술적 유산들을 체험한 것이었다. 나를 초대한 카 포스카리 대학에서는 이제 체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시 낭송과 고별 강연 포스터를 학교 도서관 기둥과 강의실 여기저기에 붙여 놓았다. 나는 미련이 다시 없도록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의 그림들을 둘러보고 숲 속 온실 카페 라 셀라에 가서 제법 익숙한 단골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작별의 눈빛을 나누었다. 이제 산 미켈레 섬만 다녀오면 베네치아를 거의 섭렵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산 미켈레 섬을 가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보기만 하고 끝내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믿을 수 없지만 나는 내 고향 보성의 감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던 열네 살 어린 소녀를 아프게 떠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날 아버지의 관 앞에서 울던 소녀가 내 안에 아직 살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어린 내가 그때 목격한 죽음은 슬픔과 공포 이상의 것이었다. 서울에서 밤 기차를 타고 내려간 고향 집에 아버지는 퉁퉁 부은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지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토록 못 잊어 하던 어린 딸을 초점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수많은 말을 삼킨 절망의 눈! 후에 정리한 것이지만, 나의 문학은 그 아버지를 다 묘사함으로써 완성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새벽 아버지는 그렇게 떠나가고, 그리고 나의 슬픔과 뼈아픔은 영원한 한파처럼 시작되어 생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흰 무명 밧줄에 묶인 목관이 장정들에게 들려 마당의 큰 감나무를 돌아 나갈 때 가족들의 곡소리는 허공을 뚫고도 남을 만큼 비통했다. 상여에 담긴 아버지는 저승사자들을 위해 지전을 흩뿌리며 산으로 사라졌다. 토호였던 그가 만든 신작로 다리를 건너 철길과 산허리를 돌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은 신묘하고 덧없는 한 마리 나비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죽음을 처음 만난 이후 나는 어디를 가나 죽음이 없는 곳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은 삶이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일찍 확인했다.
베네치아에서 무덤을 보기 싫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오직 축제에 참가한 시인이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먼 이방(異邦)에까지 와서 죽음을 목격하고 깊은 상처를 꺼내어 홀로 다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산 미켈레 섬을 마음속의 깊은 화두로 남겨두고 베네치아를 떠나왔다. 푸른 베네치아의 물결 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삶이란 답이 아니라 질문이 전부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답보다는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후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물을 주제로 ‘카르마의 바다’라는 시를 썼다. 내 시의 트라우마는 어린 날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이라며 상투적인 해석을 가하려 들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시집에서 죽음을 품은 생명과 그 질문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독재자를 찬양한 최고의 시인,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없는 조국을 비판하여 추방당한 후 타국에서 더 이상 모국어로 시를 쓰지 못한 시인도 내 문학의 화두로 겹쳐 놓았다. 하지만 아직도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나는 왜 그 섬에 가지 않았을까? 정말 모르는 것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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