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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만의 동거⑬ 엄마가 드라마를 안 보는 이유

바람아님 2016. 2. 9. 00:26
[J플러스] 입력 2016.02.08 05:42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글을 많이 읽는 노인들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읽고 생각하는 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두뇌 활동을 많이 하면 건망증과 치매를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엄마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장수했다. 할아버지는 아흔 넘도록 정정했다. 할머니는 90 가까이 생을 누렸다. 세상을 뜰 때까지 두 분은 치매를 앓지 않았다. 두 분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읽었다. 신문은 조석간을 구독했고, 월간지도 정기적으로 봤다. 할머니는 심지어 여성지까지 읽었다. 내가 두 분을 찾아 뵐 때는 “어떤 책이나 잡지가 필요하세요?”라고 묻고 갔다.

특히 할머니는 흥얼흥얼 노래하듯 작은 소리를 내면서 신문이나 책을 읽었다. 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만 읽은 게 아니라 귀로도 듣기 때문에 이해가 더 빨랐으리라. 이런 방식은 두뇌 활동에도 좋다. 소리가 뇌를 자극하고, 뇌는 그 소리에 맞춰 활동한다. 

 엄마의 건망증이 심해지고, 점차 경도기억장애가 확실해지자 난 관찰을 시작했다. 여러 잘못된 생활습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글을 꼼꼼히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문을 보긴 보는데 차분하게 끝까지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보지만 눈이 금방 아프다고 했다. 안과에 갔다. 큰 문제는 없었다. 백내장이나 녹내장이 의심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돋보기를 다시 맞추고 안경도 했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신문을 건성건성 본다.

 “왜 꼼꼼히 안 보세요?”

 “본다.”

 “안 보는 것 같은데. 그렇게 빨리 볼 수 있어요?”

 “재미없다.”

 재미가 없을 리 없다. 평생 신문 보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신문이 재미없을까. 
 다른 책을 읽는지 살폈다.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꽤 오래다. 

 “책 안 보세요? 사다 드릴까요?”

 “눈이 아프다.”

 흠. 진짜 아픈 건지. 안과에서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런데. TV는 많이 본다. 매시간 뉴스는 챙겨본다. 밤이 되면 8시 뉴스, 9시 뉴스, 마감 뉴스까지 본다. 이상한 건 드라마는 안 본다. 가요무대, 인간극장, 6시 내고향 같은 가벼운 프로그램은 본다. 하지만 드라마는 안 본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드라마는 아니더라도 사극이나 중장년용 드라마는 볼만할 텐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뭔가 TV 시청에 대한 패턴이 일관되지 않다(라고 우리 가족은 판단했다).

 관찰을 시작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뉴스만 의식적으로 찾고 다른 프로그램은 틀어 놓는다. 드라마는 절대 안 본다. 드라마에 빠지는 건 집중하는 거다. 다음 얘기가 궁금해지니 방송 시간을 찾거나 기억해 두었다가 그 시간에 채널을 돌린다.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집중하고 관심 가는 분야가 없어진 것이다. 과거에는 엄마도 드라마 챙겨봤다. 신문은 연재소설도 다 읽었다. 

 건망증이나 기억장애가 심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확실한 건 뭔가 집중할 수 있는 분야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재미있어 하고, 즐기는 분야가 없어지면서 기억장애가 심해지는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호기심은 점차 사라지고, 좋아하는 것(취미, 음식 등)도 시들해진다. 엄마가 그렇다.

 열광은 고사하고 즐겨 찾는 것도 없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내색한 적도 없다. 그저 무색무취다. 이게 무서운 거다. 갑자기 엄마의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찾아 온다. (충분히 가능한 걱정이다.)

 식구들이 나섰다. 뭔가 취미거리를 만들자고. 매일 30분씩 신문읽기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래 그러자.” 엄마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천을 못 한다. 그렇다고 약속 안 지킨다고 짜증낼 수는 없고. 다음으로 피아노를 치자고 했다. 엄마는 기초적인 악보는 볼 줄 안다. 과거에 오르간을 친 적이 있어서다. 쉬운 악보집이 마침 집에 있다. 매일 연습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말 뿐이었다. 며칠 못 갔다. 

 올 들어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했다. 두 손자는 야구광이다. 프로야구 시즌이면 거의 매일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봐야 한다. 지난해 엄마가 손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야구 볼 때만 생겼다. (물론 할머니의 황당한 질문에 손자들은 말 문이 막혔지만). 올해는 엄마가 야구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게 우리 가족의 목표다. 뭔가에 집중하고 빠져드는 건 두뇌 활동에 좋은 거다. 과연 엄마가 복잡한 경기 규칙을 이해하고, 베어스를 응원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목표지만 그래도 도전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