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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서복(徐福)로드를 찾아서

바람아님 2016. 3. 18. 23:51
중앙일보 2016.03.18. 13:52

고대 교역로 실크로드가 뜨고 있다. 특히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육상과 해상 신 실크로드 경제권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과도 관련되는 것 같다.

중국(唐)과 로마제국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동방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방실크로드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이다.

사실은 동방 실크로드보다 1500년 앞서 이지역의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여 수많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있다. 중국 진(秦)나라 사람인 서복(徐福)이다.


서복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와 회남형산(淮南衡山)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는 서복을 서불(徐?)이라고도 부른다. 서불의 불(?)은 두건(巾)을 쓴 제사장의 의미로 두건에 한 일자(一)가 들어 있는(一巾) 글자이다. 이는 두건에 ‘냄비뚜껑’을 올린 시(市)와 비슷하지만 다른 글자이다. 불(?)은 서복의 복(福)과 중국 발음(fu)이 같다.
서복이 BC 219년 진시황의 지시로 바다에 나갔다가 신선 이야기를 듣고 진시황에게 바다 건너 삼신산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해 오려고 했더니 신선이 동남동녀와 함께 오곡 종자와 백공의 제품을 가져와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3000명과 다방면의 기술자(百工)와 뛰어 난 제품을 가지고 가도 좋다고 하였다.


서복은 BC 210년 진시황이 시킨 대로 60척의 배에 5000명의 각 분야의 기술자, 3000명의 동남동녀와 함께 3년 치 식량을 준비하여 진황도를 출항하였다고 한다. 서복 일행은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고 한다. 일본은 평원광택(平原廣澤 넓은 평야와 습지)의 땅에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이 수려하며 원주민이 착해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어 돌아가지 않았다(徐福得平原廣澤 止王不來)고 한다.


학자들은 서복이 불로장생에 눈이 어두워 판단력이 희미해진 진시황을 속여 신천지에 필요한 처녀 총각 다양한 기술자 오곡의 종자 등을 대거 싣고 기획 이민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천문지리에 능한 서복은 진시황이 포악하여 진나라가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을 예견하였는지 모른다. 그 후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폭정을 이어가 백성들이 탈출하고 천하를 통일한지 15년 만에 그리고 서복이 떠난 지 4년 만에 나라를 잃은 것을 보면 서복의 선견지명을 알 수 있다.


지금 일본의 기술이 한중일 3국 중에 띄어 난 것도 당시 중국의 백공(百工)들이 일본에 정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에서는 서복이 떠날 때 많은 서책을 준비해서 가지고 나와 진시황의 분서(焚書)를 미리 피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중국에도 없는 유학 및 의약관련 서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서복이 도착한 곳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신구시(新宮市)에 가면 서복이 도착하여 살다가 죽었다하여 서복의 무덤이 있고 서복이 좋아했다는 서복주(徐福酒)도 팔고 있다.


일본의 하타(秦 또는 羽田)씨는 서복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진(秦)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붙인 이름(姓)이라고 한다. 과거 일본의 하타 쓰토무(羽田 孜) 총리가 일본 서복학회의 회장이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학자들은 서복은 선진 중국 문물을 가지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고대 이민 집단으로 본다. 한반도의 서복 유적지에는 서불과차(徐?過此) 또는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거쳐 갔다.’라는 의미의 네 글자가 바위에 새긴 명문이 많다. 그리고 제주도의 서귀포(西歸浦)도 서복이 조천포(朝天浦)에 상륙하여 불로초를 구하여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올랐다는 표시이므로 한반도는 서복 일행의 경유지로 본다.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 233-297)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한반도의 진한(秦韓 辰韓)은 마한 동쪽으로 진(秦)에서 옮겨 온 유민이 살던 나라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배를 타고 작살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고래잡이(捕鯨) 그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서복이 일행 일부를 지금의 경상도에 남겨 진한을 건국케 하고 고래잡이 등 사냥의 선진 기술을 가진 백공의 일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15년 9월 한반도의 남쪽 섬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제주도에서 한중일 3국의 서복문화 전문가들이 모여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를 창립했다. 한중일의 서복문화 관련 지역을 순회 교류하여 서복 일행이 한국과 일본에 미친 문화 인류학적 막대한 유산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문화적 유사성이 가장 높은 한중일 3국이 과거사 문제로 제대로 공통 문화를 공유 및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데 서복문화를 공통분모로 하여 한중일 3국의 서복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들 연구자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3국에 흩어져 있는 서복의 역사 유적 지구를 연구 정리하고 서복을 통해 다양한 교류를 이어간다고 한다.
또한 서복이 3국에 남긴 문화유산의 역사적 존재감을 세계에 발신하기 위하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에도 힘을 쏟는 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