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포장길을 버리고 복숭아밭 옆 도랑으로 들어갔다. 물 오른 쑥과 갓, 광대나물, 큰개불알풀이 제 세상을 만났다. 어느 하나가 문어발식으로 독점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잘 어울린 생태계. 작은 야생화가 심심하다 싶으면 남산제비꽃이 있고, 조금 높은 곳에는 개암나무가 올해의 꽃들을 내민 채 두리번거린다. 발아래 야생화들에게 햇빛을 주기 위해 장대 같은 나무들은 해마다 한 번씩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낮게 깔린 풀들 사이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현호색이었다. 쇠스랑 같은 잎을 단 가느다란 줄기 끝에 감탄스러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다. 이륙 직전의 비행기라고 할까. 줄지어 날아오르는 오리가족이라고 할까. 그때였다. 꽃에 취해 사진을 찍는데 벌 한 마리가 날아드는 게 아닌가. 주둥이처럼 벌린 꽃의 입구에 벌이 앉자 줄기가 낙엽에 닿을 만큼 휘청거렸다. 벌은 가느다란 줄기를 지렛대 삼아 꽃 안으로 파고들었다가 그 탄력을 이용하여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휙 다음 꽃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는 광경!
꽃산행을 마치고 온 밤, EBS <세계의 명화>에서 <21그램>을 보았다.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사람이 죽는 순간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예외는 없다. 21그램, 그것은 영혼의 무게일까? 5센트짜리 동전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의 무게….” 벌새는 벌만 한 몸으로 공중에서 정지하여 꿀을 빨아먹는 새라고 한다. 예외는 없다 했으니 벌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는 같은 것인가. 바람 앞에서 만날 때마다 내 영혼의 무게를 생각나게 할 현호색.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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