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기미다. 이왕이면 긴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선다. 우중충한 날씨에 하늘이 가깝게 느껴진다. 지팡이처럼 우산을 짚으며 또각또각 걸어가면 호젓한 산속이라도 걷는 기분이다. 실제로 비가 왔다. 비는 하늘에서 오는 물질이다. 빗물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있듯, 비에는 많은 소식이 담겨있다. 5월은 비를 많이 필요로 하는 계절이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다니! 내가 어제 태어났더라면 아침의 이 현상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뜻밖의 비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닳고 닳았다. 한때 또랑또랑했던 눈에도 두꺼운 각질이 쌓였다. 가물가물 저 높은 곳에서 오는 소식을 차단하면서 우산을 펼치면 어깨 근처로 빗물이 떨어진다. 귀에 풍경이라도 달린 듯 머리 둘레에서 토닥토닥 빗소리가 들린다. 마치 우산 속이 절간이라도 된 것 같다.
사흘 가는 장마가 없다고 했는데 기후변화가 막심한 요즘의 도시에는 세 시간을 못 버티는 빗줄기도 많다. 점심 무렵 비가 그쳤다. 인왕산 둘레길을 산책한다. 토함산만큼의 산세는 아니지만 이 산에도 불국사라고 하는 절이 있고 석굴암이라고 하는 암자가 있다. 그 아담한 곳으로 가는 길마다 연등이 달려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무겁게 달고 있는 연꽃들.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때가 오면 생각나는 꽃이 있다. 비단주머니라는 뜻의 금낭화다. 숲에서 군락을 이루며 사는 그 꽃들을 보면 영락없는 연등이다.
지난주 뜻밖에 맞이한 나흘간의 연휴. 가평 명지산에서 본 금낭화는 색깔과 자태가 아주 고왔다. 같은 줄기 속에서도 꽃들의 운명이 달랐다. 활짝 핀 꽃이 있는가 하면 벌써 열매를 맺은 것도 있었다. 제대로 성숙한 꽃 하나를 관찰해 본다. 조각난 하트 모양이 있는가 하면 갈래머리를 땋은 여고생의 모습도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 온 꽃동무의 해석이 압권이다. 고개를 조금 돌려 옆을 보면 용궁을 찾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과연 활처럼 휘어진 줄기에 매달려 모가지를 쑥 내밀고 힘껏 허공을 헤엄치는 자라 같은 금낭화!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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