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살며 생각하며>빼어나고 슬픈 이 땅의 딸들

바람아님 2016. 5. 14. 00:17
문화일보 2016.05.13. 14:30

문정희 / 시인, 동국대 석좌교수

여성이 하루빨리 문맹(文盲)을 떨치고 미래의 귀중한 인재가 돼야 한다는 자각으로 이 땅에 민족 자본 최초의 여학교를 세운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엄순헌(嚴純獻). 바로 고종의 계비인 엄비이다.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명성황후 민비는 잘 알려져 있지만 엄비는 덜 알려져 있는데, 엄비는 민비가 시해된 후 고종의 계비로서 영친왕을 낳은 분이다. 쇠퇴해 가는 국운을 보며 무엇보다 인재를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크게 깨닫고 그것을 곧 실천에 옮긴 당찬 여성인 것이다. 그녀는 1905년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세우고, 이어서 1906년 진명(進明)과 숙명(淑明) 두 여학교를 세웠다. 그 두 여학교가 올해로 나란히 개교 110주년을 맞았다. 이는 곧 한국 현대 여성 교육사의 출발이기도 해서 그동안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그중 먼저 설립한 진명의 경우,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요, 문필가인 나혜석(羅蕙錫·3회)을 주목하게 된다. 유사 이래 남성 중심 사회와 가부장적 전통에 정면으로 맞선 한국 근대여성의 선구자로 활약하다가 결국 이혼을 당하고 행려병자가 되어 무연고 병동에서 발견됐다. 그녀보다 한 해 후배이며 역시 도쿄 유학생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요, 여성으로서 최초로 시집을 낸 김명순(金明淳·4회)도 진명 출신이다. 


김명순은 신학문과 자유를 구가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폭압적인 성희롱의 대상이 되어 불명예를 안고 희생됐다. 하지만 알려진 바와 달리 학구열이 강한 여성으로, 시와 소설은 물론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를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사실 그녀는 살펴볼수록 억울한 초기 여성 선각자다. 그녀를 성적(性的)으로 희생시킨 남성은 해방 후 국군 창설의 공을 인정받아 각종 훈장을 받고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고, 소설 ‘김연실전’을 통해 그녀를 매우 비판적으로 묘사한 고향 선배 김동인은 문학사에서 돌올(突兀)한 작가로 대접받고 있다.


시인 노천명(盧天命·20회)은 교과서를 통해 ‘사슴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일제와 6·25전쟁을 몸으로 치르며 무사한 삶을 살지 못했다. 감상을 절제한 서늘한 시를 다수 남겼지만, 유명한 이름이 오히려 덫이 되어 옥고까지 치르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떠났다.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黃胤錫·36회)은 아직도 회자되는 아깝고 빛나는 여성이다. 사학자 황의돈의 딸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판사가 되어 화제를 모았지만, 의문의 죽음을 맞아 요절함으로써 비극을 피해가지 못했다.

여성이 안방과 부엌에서 소극적인 타자로서의 생애를 보내야만 무사하던 시대였다고 해야 할까. 초창기 여성들에게 전통과 인습의 편견은 상상보다 컸고, 그 고투와 상처는 그대로 여성사의 좌절과 비극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나혜석의 경우만 하더라도 지금은 그의 고향 수원에 ‘나혜석 거리’가 있고 많은 연구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우표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하지만 일찍이 파리를 거쳐 세계를 유람하고 돌아와 크고 넓은 세계를 좁은 나라에 알리는 일은 그 자체로 거부와 탄압의 대상이 됐다. 그녀는 끝내 좌절을 겪으며 이혼으로 인해 아이들과 헤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나오며 “어미를 원망치 마라. 어미는 시대를 앞서 산 선각자였느니라”고 한 절규는 지금 봐도 피눈물이 섞여 있다.


진명 110년의 역사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중요한 여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서 꼭 기억해 두고 싶은 이름 하나가 역사학자 박병선(朴炳善·30회)이다. 서울대를 졸업한 후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 비자를 받아 유학한 분이다. 소르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며 한국의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의 실체를 밝혀낸 여성이다.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78년 앞선 것으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임을 증명해낸 것이다. 


그녀는 베르사유 도서관 별관 고문서(古文書) 파손 창고에서 곧 폐기될 위기에 있던 녹색 비단으로 만든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찾아냈다. 이 귀한 자료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1년 한국으로 반환되기에 이르렀다. 박병선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사라졌을 보물이요, 세계적인 유산이다. 그녀는 이렇듯 프랑스가 약탈해간 귀중한 외규장각 도서를 우리나라에 반환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귀중한 업적을 이뤘지만, 연전에 프랑스에서 병마와 싸우다 홀로 타계했다.


대강 살펴봐도 민족 자본 최초의 여학교 110년의 역사는 그대로 한국 현대 여성사와 맞물림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옛 앨범에서 새로 발견한 개교 50주년에 쓴 노천명 시인의 축시가 아름답고 처연하다.

‘무거운 방장(方帳) 속 첩첩 대문 안에/ 이 나라 부녀들 맹아(盲啞)모양 있을 제/ 우리님 등불 들고 찾으러 오셨나니/ 아, 장하고 장하여라// 장옷 쓰고 교군 속에 숨겨져/ 배우러 나오던 진명의 옛 딸들/ 모시어 내 오던 스승들의 수고를 잊을리야/ 한 알의 씨앗은 천으로 만으로 퍼졌어라’.


노천명의 축시 ‘목화송이 모양 눈부시어’ 중 일부인데, 60년이 흐른 2016년, 개교 110주년을 맞아 후배 시인은 이렇게 이어 썼다.

‘…이제 그 향기 더 넓게 더 높게 퍼져 나가서/ 비옥한 산하를 이루고/ 우리들의 밝은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한 마리 크낙새로 깃을 펼치리라…’. ―문정희(55회)의 축시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