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친구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약간 부끄럽다고 내게 고백한다. 나는 고성(古城) 한양의 도시계획에 대해 한 번도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조선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황제는 무한 권력을 휘둘렀다. 반면 조선 국왕의 권력에는 명백한 제한이 가해졌다. 우선 경복궁, 그다음 창덕궁에 적용된 설계의 목적은 ‘위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지 궁궐을 바라보는 사람을 압도하거나 왕은 초인(超人)이라는 뜻을 내비치는 게 아니었다. 이름 자체가 접근을 금하는 베이징의 자금성과 달리 한국의 궁궐들은 북촌에 사는 학자 관료의 집보다 많이 크지 않았다. 학자 관료들의 집 또한 평민들이 사는 집보다 훨씬 크지 않았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만 봐도 서구에서 극단적인 정치 권력이 물리적 환경에 어떻게 표출됐는지 알 수 있다. 1900년께의 서울 사진을 보여 주면 학생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타운하우스나 넓은 대로가 늘어선 당시의 파리와 비교하면 한국이 발전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1860년대에 파리 개조사업을 진행한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얼마나 지역 공동체에 대해 무감각했는지 알게 된다면 근대 파리의 변화가 무조건 잘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서울 궁궐의 소박함은 한국 유교 전통에서 가장 훌륭한 점을 표상한다. 한국의 왕실과 고위 관리들은 행실이 보다 투명했고 백성에게 보다 책임성이 있었으며, 공중에게 대표성을 발휘하는 방식이 보다 인간적이었다.
서울과 베이징의 차이는 14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양국을 다스린 강력한 지도자들은 몽골제국 붕괴 이후의 무질서를 극복하고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중국의 경우 영락제(永樂帝·1360~1424)는 혹독하게 통치했다. 극단적인 조치로 통치자와 시민 사이에 절대적인 거리를 강요했다. 영락제가 확립한 비밀경찰제와 상층부가 비대한 관료조직은 황제에 의한 군주정이 끝날 때까지 중국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영락제의 통치는 유교 전통을 왜곡시켰다. 또 신(神) 같은 존재가 된 황제는 거대한 관료집단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됐다.
반면 한국의 세종 대왕(1397~1450)은 시민에 대한 책임성을 그가 생각한 거버넌스 비전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가 상상한 왕은 왕국의 겸허한 종복이었다. 세종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종이 평민의 복지를 정부의 최우선과제로 삼았으며 고도의 견제·균형체제를 수립한 것이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투명하게 통치한 조선은 500년 넘게 생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