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1.22 김덕한 뉴욕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홍콩 누아르에 나오는 불사신 같다.
영화 '영웅본색'의 주인공 소마(주윤발 분)는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를 맨몸으로 달려도,
빌딩에서 떨어져 몇 번을 굴러도 죽지 않는다.
미국 대선 기간에 트럼프는 '입' 가졌다는 미국 언론, 지식인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내가 올해 들어 인터뷰한 지식인, 정치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어떻게 트럼프 같은 인간이…"를 입에 달았다.
그 '트럼프 같은 인간이' 링컨의 정당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됐을 때 그들은 당황했고
대통령이 되자 공포까지 느끼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석학이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커진 지난 8일 밤 "무서우리만큼 믿기 어렵다.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올렸다가 다음 날 지웠다.
트럼프는 오직 입 하나로 버텼다.
소마가 총 한 자루로 불바다를 누비듯 트럼프는 막말과 욕설, 감언이설, 쇼맨십으로,
그렇게 맞고도 안 죽고 살아서 대통령이 됐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널려 있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많았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이겼다.
부동산 재벌인 그가 '못 배우고 가난한 백인들의 대변자'가 되는 얼핏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일어나게 한
그의 '주장'을 파헤치고 깨뜨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트럼프의 집권이 초래할 위기에 대해 진지하게 설득하지 못하고 '도저히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수준 낮고 천박한
트럼프'만을 강조하며, 전선(戰線)을 상호비방전에다 설정한 것은 한참 잘못된 선택이었다.
트럼프의 주장대로 나토(NATO)와 나프타(NAFTA)가 무너지면 미국의 안보와 산업이 어떻게 흔들릴 것인지,
미국 이외의 세계가 흔들리면 미국은 얼마나 큰 부메랑을 맞게 될 것인지 설득하지 못했다.
이런 얘기들은 트럼프 정부의 인선(人選) 작업이 한창인 지금에야 듣고 있다.
인신공격으로 치고받는다면 클린턴이 완승을 하긴 어려운 구조였다.
클린턴이 국무장관의 공무 비밀 메일까지 개인 이메일 계정으로 주고받은 걸 은폐하기 위해 3만3000건이나 되는
이메일을 지웠고, 월가(街)의 금융기관에서 한 번 강연에 몇 억원씩 받았고,
전직 대통령인 남편과 만든 재단에 엄청난 기부를 받았다는 사실은 실제로 심각한 결격 사유였다.
이 전선에서 싸우다 클린턴은 최후의 순간까지 발목이 잡혔다.
클린턴과 그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당위에 대한 오만,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깔려 있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클린턴 진영을 대할 때 이른바 '무식하고 교양 없는' 사람들은 침묵하고 숨는다.
그러나 마음속엔 칼을 간다. 그 칼이 이번 대선에서 '기득권'을 내리쳤다는 사실을 지고 난 뒤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지난 7일 선거 유세 마지막 날 클린턴이 행했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리조차 위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다리는 벽보다 한참 못한 것이 돼 버린다.
이기고 봐야 하는 대선에서 어려운 정책 설명으로 어떻게 이기느냐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지레 포기하고서는 결국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번 미국 대선이 보여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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