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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벽돌책] 아닌 척하지 마라, 결국 중요한 건 유전이다

바람아님 2016. 11. 26. 13:14
(조선일보 2016.11.26 장강명 소설가)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장강명 소설가
'빈 서판'의 한국어 번역본은 무려 901쪽에 이르는데, 2004년에 출간됐다. 
이때만 해도 이 정도 분량이면 상·하 2권으로 나눠서 내는 게 출판계 상식이었다. 사이언스북스의 
노의성 주간은 "분권을 해야 더 비싸게 팔 수 있는데, 쪼갤 수가 없는 책이었다"며 웃는다. 
거듭 고민해도 독자가 한 흐름으로 읽을 수 있도록 편집하는 게 옳다는 결론이었다고.

'빈 서판'을 읽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설명이다. 논지를 빈틈없이 이어가는 저자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발의 열기로 가득한 책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얼음 아래서 활활 타는 한 덩어리 불길 같은 느낌이랄까.

간혹 이 책을 '인간의 행동은 유전과 환경 양쪽으로부터 모두 영향을 받는다는 내용'이라고 소개하는 글을 본다. 
글쎄? 이 책, 그렇게 얌전하지 않다. 
그보다는 '유전이 진짜 중요하다니까! 제발 아닌 척하지 말자!'가 더 제대로 된 요약이다. 
몇몇 대목에서 스티븐 핑커는 거의 울분에 찬 것처럼 보일 정도다.

'빈 서판'
그 '아닌 척'들의 목록에는 이런 것들도 있다. 
폭력과 범죄는 모두 잘못된 교육과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믿음, 
남녀 차이는 생물학적 특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로지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주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 
어떤가. 꽤나 위험한 책 아닌가. 
핑커는 이런 '아닌 척'들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폭로하고, 
우리가 선천성이라는 개념을 왜 두려워하는지 분석하는 한편, 
그런 선천성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추구해야 할 가치와 그 방법에 대해 논한다.

심리학과 인지과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너무나 유려하게 펼치는 주장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갑절로 위험하다. 일반 교양 독자들은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물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핑커의 비판 대상에는 엘리트 예술이나 포스트모더니즘도 있는데,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현대예술을 살피는 
대목이 무척 흥미롭고 때로는 통렬하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등의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어렵다.

'빈 서판'은 출판사의 걱정과는 달리 국내 발매 석 달 만에 5000부가 팔리며 호응을 얻었다. 
살짝 과장을 섞으면 '벽돌책 유행'의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이후 사이언스북스는 마음 놓고 벽돌책을 펴내는 것 같다. 
2014년에 나온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한국어 번역본은 1400쪽이 넘어간다.

※소설가 장강명씨가 소설가 정유정씨의 북칼럼을 이어받습니다. '장강명의 벽돌책'은 월 1회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