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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카지마 아쓰시 단편선 <산월기>, 1400년 전 열등감에 빠진 남자의 최후

바람아님 2016. 11. 26. 13:40
(오마이뉴스 16.11.07)

1400년 전 열등감에 빠진 남자의 최후
[서평] 나카지마 아쓰시 단편선 <산월기>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는 성격, 가치관, 취향, 성향과 같은 것도 있지만 학벌, 사회적 지위, 자산, 
사는 곳과 같은 것도 있다. 사람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우열이 나뉘는 기준에 따라 판단되어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열등감을 자극하여 인간의 자존감을 꺾기 때문이다. 
이는 그 기준에 따라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자신을 판단해도 마찬가지다.

열등감은 인간을 분노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재산을 노리는 등의 다른 이유가 없는데도,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고 지내던 사람을 죽이는 일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한다. 열등감은 인간의 자존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도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다루기 까다로운 감정인 것이다. 

 산월기산월기(山月記)/ 저자 나카지마 아쓰시

역자 김영식/ 문예출판사/ 2016.10.10/ 페이지 296
833.6-ㄴ43ㅅ / [마포]문헌정보실  

나카지마 아쓰시의 <산월기>는 열등감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다. 
제2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고 일컬어지는 저자가 당나라 시대의 인물들을 통해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남보다 뛰어났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인간이, 
후에 남보다 뒤처지게 되자 미쳐버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사람인 원참은 감찰어사가 되어 지방으로 가라는 어명을 받는다.
그런데 그는 지방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호랑이가 한 마리 있어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 
날이 새면 가라는 역참 관리의 말을 무시하고 길을 나아간 원참은 
호랑이를 만나고야 만다. 다행히 호랑이는 원참을 잡아먹지 않고 살려준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원참의 친구였던 이징이었다.

원참의 과거 동기인 이징은 박학다식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뛰어난 능력의 자신이 하찮은 미관말직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결국, 이징은 같잖은 직위에 머무르며 상관 비위나 맞추느니, 문학으로 이름을 남기겠다고 일을 때려치웠다. 
그러나 시는 잘 지어지지 않았고,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지방 관리가 된다.

이징이 뒤늦게 지방 관리가 되었을 때, 자기만 못하다고 여겨졌던 동기들은 자신의 상관이 되어 있었다. 
우둔하고 멍청하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자신보다 잘 나가는 모습을 보자 이징의 자존심은 크게 꺾이고 말았다. 
점점 더 심한 열등감을 느끼던 이징은 미쳐서 호랑이가 되고 만다.

이징은 원참에게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다. 
사실, 이징은 자신이 뛰어난 인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범한 사람과 교류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맹수를 키우는 사육사이며, 그 맹수는 바로 각자의 성정인데 이징에게는 수치심이 맹수였다. 
결국 이징은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사이에서 호랑이를 키우고야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가진 약간의 재능을 다 허비해버렸던 셈이다. 
인생이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나 길지만 무언가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다는 둥 입에 발린 경구를 지껄이면서도, 
사실은 부족한 재능이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각고의 노력을 꺼린 나태함이 나의 모든 것이었다. -17P

결국 이징은 최선을 다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키워보지도 못하고, 속세에서 관직을 차근차근 밟지도 못한 채, 
열등감에 미친 호랑이가 되고 말았다. 끝내 그는 원참에게 인사를 마치고 호랑이인 상태로 떠나며 이야기는 끝난다.

동기를 만나는 일은 인생의 소소한 이벤트다.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던 사람을 만나서 그리운 얼굴을 확인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좋은 사이였던 친구라면 기쁨은 배가 될 것이다. 
서로 오가며 다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끊어진 관계가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처지가 비참해졌을 때, 열등감을 심하게 느낄 때, 재회는 과거와 달라진 친구와의 모습과 처참한 내 모습만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나름의 자신감과 우월함 속에 살다가 사회에 나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자신을 
잃어버렸다면, 자신의 잘 나가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를 만나는 일은 끔찍한 지옥일 것이다.

<산월기>는 이러한 열등감을 제대로 짚어낸 소설이다. 
1400년 전의 중국을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지만, 
시험과 탈락의 연속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있다.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평가하고 평가당할 것을 요구받는다. 
대학 입학, 취업, 회사 내의 승진을 비롯한 다양한 요소들이 관문처럼 작용하고, 
관문을 넘지 못한 이들은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망설인 적이 있다면 더더욱 자기를 책망하고야 만다. 

타인에게 계속해서 평가를 당하는 이들은, 자존감의 기준을 외부에 두기 쉬워진다. 
수치와 교만 속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과거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잘 나가는 동기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을 끓이는 이징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열등감에 미치기 쉬운 세상에서, 호랑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읽어봐야 할 책이다.



■ 지은이 소개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 1909~1942)
1909년 도쿄 출생. 1920년에 용산중학 한문 교사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경성으로 건너와 용산소학교를 거쳐 경성중학에 입학,

 4학년 수료 후 1926년 도쿄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경성을 떠났다. 1933년 도쿄제국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고등

여학교의 교사를 거쳐 일본 식민지 팔라우 남양청에서 서기로 교과서 편찬 작업을 했다.


1942년 귀국하여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나 지병인 기관지천식으로 33세로 요절했다. 대표작 〈산월기〉는 전후부터 지금

까지 일본 교과서에 늘 실리는 ‘국민교재’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번뜩이는 지성으로 빚어낸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으며, 특히 소년기를 조선에서 보낸 나카지마는 경성을 배경으로 세 편

(〈범 사냥〉, 〈순사가 있는 풍경 – 1923년의 한 스케치〉, 〈풀장 옆에서〉)의 소설을 남겼다. 이 작품들에서 나카지마는 고뇌

하는 지식인의 냉철한 시선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을 짚어냄과 동시에 당시 비참했던 조선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어 우리에게도 중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나카지마 아쓰시는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세상이 흑과 백으로 쉽게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사회에서

사람들이 갈등하는 것은 그런 복잡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큰 원인이 있다. 흑과 백뿐만 아니라 노랑과 빨강 등 많은 색이

 그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에야 비로소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지고, 그 이해는 화해와 통합으로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물이 처한 복잡다단한 측면을 생생하게 살려낸 나카지마 아쓰시의 작품은 인생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한 통찰력을 제시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수(서울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