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11.06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962년 8월 17일, 동베를린에 거주하는 18세의 청년 페터 페히터(Peter Fechter)는 친구인 헬무트 쿨바이크와 함께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기도했다. 그들의 계획은 우선 장벽 가까이 있는 목공소에 숨어 들어갔다가, 초병들 몰래 창문 밖으로 뛰어서 장벽을 넘은 다음 중간지대를 달려간 후 마지막으로 철조망이 둘러쳐진 2m 높이의 펜스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는 계획대로 마지막 펜스를 뛰어넘었지만 그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펜스 위에 있는 그에게 초병들이 사격을 가해서 골반에 총을 맞은 것이다. 그는 중간지대로 굴러떨어졌고 40분 동안 피를 흘리며 누워 있다가 결국 사망했다. 그가 도와달라고 소리쳤지만 동베를린이든, 서베를린이든 어느 쪽 사람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다만 동독 병사들에게 "살인자!"를 외쳐댈 뿐 그들 자신이 총격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동베를린의 초병들 역시 사흘 전에 서독 경찰로부터 총격을 당한 사건이 있었던지라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결국 페히터가 절명한 뒤에야 동독 병사들이 시체를 거두어 갔다. 당시 총을 쏜 초병들은 동독 정부로부터 상을 받았으나, 통일이 된 후인 1997년에는 오히려 살인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20~21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동서독 국경을 가르는 총 길이 155km의 장벽은 1961년에 세워졌다가 1989년에 무너지기까지 냉전시대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다. 이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모두 23만5000명에 달한다. 1964년 10월에는 57명의 동독 사람들이 땅굴을 파서 서쪽으로 넘어 왔고, 1979년에는 두 가족이 기구(氣球)를 타고 하늘을 날아서 서베를린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히터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람도 적지 않다. 모두 1245명이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했고, 그 가운데 바로 장벽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만 136명이나 된다. 죽음은 면했으나 탈출을 기도하다가 체포된 사람도 6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평균 4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1999년에 페히터가 죽은 자리에 새로 세워진 기념물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그는 오직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
(참고이미지)
(단면도)
(탈출 순간)
(브레송-베를린)
'人文,社會科學 > 人文,社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32] 빵 (0) | 2013.08.15 |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3] 코다크롬 (0) | 2013.08.14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26] 지도자와 미래 (0) | 2013.08.13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30] 마오리족과 모리오리족 (0) | 2013.08.13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2] '해거리'의 자유 (0) | 2013.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