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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32] 빵

바람아님 2013. 8. 15. 09:00

(출처-조선일보 2009.11.13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빵이라는 말의 어원이 포르투갈어인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이 처음 빵을 접한 것은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그렇지만 빵은 너무나도 생소한 식품인지라 19세기가 될 때까지도 호기심으로 먹어보는 정도이지 일상적인 먹을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빵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전쟁 때문이었다. 휴대가 간편하고, 보존이 잘 되며, 따로 조리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어서 군사식량으로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각 번(藩·제후가 맡아 다스리는 영지)이 경쟁적으로 군사용 빵 개발에 나섰다. 예컨대 미토번에서는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서 마치 엽전 꿰듯 줄로 여러 개의 빵을 묶어 허리에 찰 수 있는 '효로센(兵糧錢)'이라는 건빵을 만들었고, 사쓰마번에서는 영국 기술을 들여와서 검은깨를 넣은 딱딱한 군용 빵인 '무시모치(蒸餠)'를 만들었다. 이때 군용 빵을 많이 공급한 곳 중 하나가 오늘날에도 일본 전국에 지점을 두고 있는 유명한 빵집 후게쓰도(風月堂)이다.

그 후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해군이 빵을 원양항해용 식량으로 채택했고(1872), 곧이어 육군 역시 군용 식량으로 빵의 장점을 확인하고는 쌀밥과 빵을 병용하기로 했다(1877).

19세기 말에는 유럽 각국의 군용 빵을 조사한 결과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군용 빵을 개선해 나갔는데, 이때 쌀밥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진 일본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쌀가루, 볶은 콩가루, 검은깨 등을 첨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노일전쟁 이후 빵이 군용식량으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차대전 이후에는 민간인들 사이에도 빵이 널리 보급되어 갔는데, 이때에는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기존의 영국식 빵이 아니라 대량생산하는 미국식 사각빵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 빵에다가는 쌀밥 대신 먹을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밥식(食) 자를 붙여서 '식빵'이라는 창의적인 이름을 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빵을 먹으면 금방 배가 꺼지므로, 보기에만 좋지 실속이 없다는 의미로 '양복점 기모노'에 비유되었다.

결국 빵은 주식은 못 되고 간식 정도의 자리만 차지했다. 일본을 통해 뒤늦게 빵을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 오히려 최근 빵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서 쌀 소비가 줄어들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