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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3] 코다크롬

바람아님 2013. 8. 14. 19:19

(출처-조선일보 2009.06.30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코다크롬(Kodachrome)/온갖 멋진 화려한 색깔들을 가져다 주네/여름의 녹색도 가져다 주네/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모두가 화창한 날이라고 생각한다네/…/그러니 엄마, 제발 내 코다크롬을 뺏지 말아주세요." 가수 폴 사이먼이 1973년에 불러 빌보드 2위를 기록한 '코다크롬'의 가사 일부이다.

이 같은 사이먼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지난(2009년) 6월 22일 코닥 회사는 코다크롬의 생산을 중단했다. 1935년에 출시되어 무려 74년간 사진애호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대표적인 컬러 필름이 드디어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특별히 자연의 색을 정확하게 재현해주는 특성 때문에 1980년대 중남미 열대림에서 온갖 동식물의 사진을 찍던 나도 무척이나 애용했던 필름이다. 내가 필름에 담던 그 많은 동식물들의 상당수가 지금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들을 기록해둔 필름이 먼저 멸종해버린 셈이다.

코다크롬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낸 장본인은 말할 나위도 없이 디지털 카메라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종막을 보는 마음이 못내 아리다. 사실 사진계의 아날로그 시대의 종언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2001년에 이어 2008년에도 또다시 파산 신청을 낸 폴라로이드 회사는 이미 2007년부터 한때 우리 모두가 열광했던 폴라로이드 즉석카메라를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 강의하던 시절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애용했었다. 나는 어느 수업이든 강의 첫 시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학생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찍었다. 그리곤 학생들에게 제발 일주일만이라도 꼭 같은 자리에 앉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 다음 나는 그 사진을 책상머리에 붙여 놓고 일일이 한 학생씩 얼굴을 바라보며 이름을 외우곤 했다. 학생들은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을 하는, 어눌하지만 진지한 외국 선생에게 하릴없이 후한 점수를 매겨주었다.

사실 이런 일은 디지털 카메라로 더 잘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슨 까닭인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같은 지고지순(至高至純)의 노력을 멈췄다. 따지고 보면 디지털은 여전히 아날로그를 품고 있건만 우리가 너무 쉽게 아날로그의 콘텐츠를 포기하는 것 같다. 이어령 선생님의 '디지로그'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