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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마법사의 노동

바람아님 2017. 1. 15. 23:25
국민일보 2017.01.15 18:06

쏟아지는 별빛을 덮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큰 교자상에 갈비찜과 톡 쏘는 양장피, 무를 넣어 조린 고등어와 고추장에 무친 시금치, 오징어 파래전 그리고 무국이 차려 있었다. 누가 마법을 부린 것일까? 마법사는 우리 외숙모들. 여기는 나의 외가 청양이다. 오늘 아침 밥상은 아흔네 번째 생신을 맞이한 외할머니의 생신상이었다. 지난밤, 자정까지 세 분의 외숙모들이 무를 씻고 야채를 썰고, 시금치를 삶고, 양념을 만들어 고기를 재워놓고, 파래를 헹구고, 오징어를 다지는 등 마법사의 전처리 과정을 수행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외삼촌, 외사촌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자정의 마법사들은 부엌에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마법사들끼리만 통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간간이 웃음소리도 알맞게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마법의 효과가 전혀 없다.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것일 뿐. 마법사의 남자들은 마루에 다소곳이 앉아 부엌에서 가져다주는, 마법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음식을 안주 삼아 잔을 기울인다. 때때로 시국을 개탄하고, 각자가 속해 있던 자리에서 횡행했던 적폐들에 대해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은 나도 마법사여서 내가 ‘ㅁㄴㄹ’라는 명찰을 달아야 하는 곳에 가서는 부엌에 있어야 했지만, 외가에서는 나의 위치에서 마법을 부리는 것은 월권행위다. 그래서 마법사들의 보조 아니면 설거지 정도밖에 허락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조금 폼 나는 일은 마법사들의 커피 물을 끓이는 정도.


곧 설이다. 계란 값도 오른 상황이고, 무값도 세 배. 야채, 고기를 막론하고 모든 마법의 재료값이 엄청나게 뛰었다. 진짜 전국의 마법사들이 파업하고 싶을 정도로 그 어느 해보다 더 고될 마법의 전처리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을 개탄하고, 사회 곳곳의 적폐에 대해 논할 때, 누군가는 마법을 부린 것처럼 그 다음 날 뚝딱, 설 차례와 명절 음식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유형진(시인),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