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윤평중 칼럼] 문재인에게 대한민국을 묻는다

바람아님 2017. 1. 20. 17:52

(조선일보 2017.01.20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정의만 외치는 아마추어 정치인은 자기 신념 윤리 앞세우다 재앙 초래

프로 정치인이라면 책임 윤리 가져야… 대한민국은 묻는다

문재인은 객관적 현실 점검하고 행동의 결과 책임지는 자세 있는가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대한민국이 묻는다'가 출판되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이하 문재인)의 대선 출사표다. 

대담집이자 공약집인 이 책은 대세론을 구가하는 선두 주자의 자신감이 넘친다. 

외교·안보에서 저출산·고령화까지 열 분야의 국가 비전을 밝혔다. 

문재인이 시대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차기 대선 과정 자체가 뜨거운 촛불의 자장(磁場) 아래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국민적 환멸은 차기 대선을 'anything but Park'(박근혜 버리기)으로 만들었다. 

'이게 나라냐'는 구호가 단적인 사례다. 문재인의 제 1성(聲)은 정상 국가를 바라는 민심을 반영한다. 

청와대를 시민 품에 돌려주고 광화문 정부 종합청사로 출근해 정책 결정 과정과 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권력기관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공약, 즉 공수처 신설과 검찰·국정원 개편도 시의적절하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토대 없는 경제 민주화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정곡을 찔렀다. 

반칙과 특권을 넘어 상식과 정의를 지향하는 그의 비전은 시대의 부름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선 바른 출발이 성공적 결실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정의 실현의 주체이자 독점적 폭력 기구라는 국가의 모순적 성격을 이해하는 정치인만이 

현실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국민 생명과 국가 존망을 결정하는 적나라한 힘의 영역이므로 지도자는 때로 '권력과 폭력에 깃든 악마적 힘'과 

제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교·안보 영역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문재인은 국가의 본질인 정의와 

폭력의 조율 관계를 너무 소홀히 다룬다. 

출사표의 외교·안보 정책이야말로 그의 가장 약한 고리다.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이며 아마추어적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불교지도자 신년하례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문재인은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강대국의 벌거벗은 힘이 소용돌이치는 한반도에서 이를 실천할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선 침묵한다. 

총체적 안보 위기 상황에서 '군 복무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하는 게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당선된다면 '가장 먼저 북한을 방문할 것이며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즉각 재개할 것'이라는 공약도 마찬가지다. 

핵미사일로 대한민국을 협박하는 김정은과 유화책만으로 평화 공존이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유화 정책과 압박 정책 모두 북한 핵무장을 막지 못했다. 

북한 체제의 내구성과 제국(帝國) 중국의 북한 거들기 때문이다. 

유화책과 압박 정책의 대립 구도를 넘어 제3의 접근법을 찾아야 할 긴박한 시점에 문재인은 순진하게도 

유화 정책 재개만을 강조한다.


사드 재검토 역시 무책임하다. 사드는 우선적으로 절체절명의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다. 

사드의 함의는 매우 복합적이어서 '중국의 밀어내기와 미국의 버티기'라는 세계사적 패권 투쟁에 관한 국제 정치적 인식을 

요구한다. 대륙 문명 대(對) 해양 문명의 각축전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문명사적 국가 대전략과 직결된다. 한·일 위안부 합의 재협상도 신중하지 못한 제안이다. 

여론을 따라가기만 하는 수동적 리더십으로는 미래 지향적인 국가 대계 설계가 불가능하다.


문재인은 아직 운동권 지식인의 자취를 지우지 못했다. 

주관적 내면의 믿음을 앞세우는 '신념 윤리'에 집착하는 게 그 증거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역사나 근현대 정치사는 정의만을 외치는 아마추어 정치인의 신념 윤리가 국가적 재앙을 낳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와 달리 프로 정치인의 '책임 윤리'는 객관적 현실을 냉철히 점검한 후 행동의 결과를 책임진다. 

결과를 묻는 책임 윤리야말로 외교·안보의 아마추어인 문재인이 체득해야 할 핵심 덕목이다.


남북 관계의 원점은 권력과 폭력이 교차하는 아수라(阿修羅)의 현장 그 자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 지식인의 주관적 신념 윤리를 넘어 책임 윤리 차원에서 제주 해군기지와 한·미 FTA를 추진했다. 

제국 중국의 군사적 팽창과 한·미 FTA의 성과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노무현은 지지층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 백년대계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결과가 의도보다 훨씬 중요한 게 현실 정치다. 

정치인은 책임 윤리에서 나온 대중적 확장성을 갖춰야 지도자로 상승한다. 

국가의 본질을 꿰뚫어야만 성공한 대통령이 된다. 

문재인이 과연 그런 비르투(virtu·능력)를 가졌는지 대한민국이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