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7-01-31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아무리 생각해도 젊은이들이 제일 신나게 명절 연휴를 보냈을 것 같아 먼저 우리 센터 인턴 두 명에게 물어봤다. 핀란드에서 온 헤나 씨는 남자 친구와 같이 테마파크에 갔다고 했다. 국내 테마파크들은 평소에 각종 카드 소유자에게 할인 혜택을 많이 주는데 외국인들은 그런 카드가 없으니 할인을 못 받고 잘 가지도 않게 된다. 하지만 명절에는 외국인을 위한 특별 할인 행사들이 있어 좋은 기회를 잡아 달콤한 추억 하나 만들었다고 했다.
터키에서 온 제렌 씨는 경험이 좀 달랐다. 설 전에 계획을 물어봤을 때 외국인이고 남자 친구도 없으니 외롭게 보낼 것 같다고 애기했다. 하지만 설 연휴 전날 우리 센터 직원 한 명으로부터 조그만 선물과 함께 고백을 받아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출근할 오늘만 기다렸다고 했다.
사실 설날이 되면 외로운 외국인이 많다. 내게 평소에는 만나기가 힘든 친구 한 명이 있다. 거의 매일 한국인 남자 친구랑 데이트하기 때문이다. 근데 설에 갑자기 내게 연락을 해 “우울하다”라고 하소연했다. 나흘간 지방으로 내려간 남자 친구가 잠수 중이라는 거다. 사귄 지 몇 년 됐고 서로 평생 파트너로 생각은 하고 있지만 장남인 남자 친구는 아직까지 부모님께 외국인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남자 친구 어머니가 자꾸 선까지 보라고 하니 답답하고 기분이 안 좋았다고 한다.
결혼한 사람 중에도 외로운 사람이 적지 않다. 외국인 아빠 온라인 포럼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어 봤다. 한국어가 서툴러서 친척들과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혼자 있는 것처럼 느꼈다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의 외국인 아빠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오랜만에 아내 가족과 다 모여 나흘간 같이 시간을 보내서 즐거웠다는 사람들과 너무 괴로웠다는 사람들이다.
괴로웠다는 외국인 사위의 불만은 크게 3가지였다. 제일 큰 불만은 조카들에게 봉사로 영어 가르치는 부탁을 받는 것이다. 두 번째 불만은 술이다. 잘 모르는 친척들이 원치 않는 술을 자꾸만 강요해 적잖이 불편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아내가 명절 음식을 하고 정리를 하느라 하루 종일 고생하는 모습에 대한 불쾌감과 미안함! 이것은 한국 남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외국인 며느리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궁금해 주변에 있는 이주민 여성 몇 명에게 물어봤다. 조금은 편하게 명절을 보내는 외국인 사위와 달리, 외국인 며느리는 한국인 며느리와 마찬가지로 피곤하고 힘든 명절을 보낸다고 했다. 대부분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한 베트남 이주 여성 이야기를 듣고 나니 참 슬펐다. 베트남에서도 설날은 매우 중요한 명절이다. 그런데 매년 시댁에서 설을 보내니 베트남에서의 전통은 하나도 못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베트남에도 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다문화주의, 동화주의에 대한 찬반 여부를 따지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설날 음식 중에 바인쯩(설날에 먹는 베트남 떡)이나 짜조(스프링롤 튀김)를 한국의 설날 음식과 함께 먹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싶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설날은 즐거운 축제이기도 하고 힘든 숙제이기도 한 것 같다.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설날을 보내고 있지만, 새해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깊은 의미는 모두에게 동일할 것이다.
또 다른 고민을 하나 얘기하면서 이번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쉽게도 이번 명절을 혼자 보냈지만 다음 명절에는 아마 여자 친구 집을 방문하게 될 것 같다. 여자 친구 부모님이 명절 음식을 많이 권할 것 같은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표정 관리가 안 되더라도 억지로 먹어야 할지, 아니면 정중하게 거절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다.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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