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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거울의 방

바람아님 2017. 3. 8. 23:29
한국경제 2017.03.08 17:35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사유 궁전까지는 기차로 30분, 베르사유 리브 고슈 역에 내려서 10분만 걸으면 닿는다. 궁전(2만6000평)과 정원을 포함해 246만평의 엄청난 규모에 우선 놀란다. 여의도 전체 면적과 맞먹는다. 광장 입구에서 방문객을 맞는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청동 기마상이다. 루이 14세는 아버지의 사냥 별장이던 이곳을 대대적으로 증축한 뒤 1682년 파리에서 거처를 옮겨왔다.


그 유명한 ‘거울의 방’을 찾아 2층으로 간다. 길이 73m, 넓이 10.5m의 웅장한 홀에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시다. 정원 쪽으로 난 17개의 커다란 창문, 반대편 벽의 거울들이 함께 반짝인다. 578장의 거울을 이어서 벽 전체를 장식했으니 330여년 전엔 생각지 못할 첨단 시각장치다. 왕족 결혼식이나 외국 대사 접견 등 중요한 의식이 모두 이곳에서 이뤄졌다.


이 방의 거울들은 영광뿐 아니라 치욕의 역사도 지켜봤다. 1871년 1월 프랑스에 승리한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의 황제즉위식을 연 곳이 바로 여기다.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통일의 여세를 몰아 프랑스까지 격파하고 새 제국을 선포한 곳이니 프랑스로서는 국치의 현장이다. 그날은 프로이센 국왕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변신한 빌헬름 1세가 이 방의 주인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인 1919년 6월, 이곳에 다시 독일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번엔 1차대전 패전국으로 프랑스 등 연합국에 항복하러 온 것이다. 이날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쟁은 공식 종결됐다. 독일은 48년 전 화려한 즉위식을 연 이 방에서 맥없이 무장해제당하고 엄청난 액수의 전쟁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2002년 11월 삼성전자가 베르사유 궁전을 통째로 빌려 전 세계 기업인과 기자들 앞에서 글로벌 로드쇼를 펼쳤을 때다. 정상을 위한 만찬이나 외교행사 외에는 좀체 대관해주지 않는 프랑스가 삼성에 특별히 허용한 것이다. 그날 베르사유궁 광장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특정 국가가 아니라 한 기업을 위한 것으로는 최고 등급의 배려였다.


그저께는 유럽연합(EU) 4대 강국 정상이 이곳을 찾았다. 유럽연합 모태가 된 로마조약 60주년을 맞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가 모인 것이다. 이들은 각 회원국이 통합 속도를 스스로 선택하는 ‘다양한 속도의 유럽’ 방식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분기점마다 주목받는 거울의 방. 그곳에서 넋을 잃고 구경하다 허둥대던 내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고두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