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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 남편傳]에디슨, 발명은 '왕'이나 가정엔 '꽝'이었던 가장

바람아님 2017. 3. 14. 23:20
아시아경제 2017.03.14 08:00
발명왕 에디슨 모습(사진=위키피디아)


토머스 에디슨은 흔히 '발명왕'으로 알려진 사업가로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위인 중 한사람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그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전구'와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세계적 기업 제너럴 일렉트로닉스(GE)의 창업 역사 역시 일종의 신화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 위인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위대한 발명왕이지만 그는 가정에서는 최악의 가장이었다. 얼마나 가정에 소홀했으면 첫 번째 부인인 메리 스틸웰은 알콜중독에 시달리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지만 부인 장례식에 가지도 않았다. 큰아들은 길거리에서 아사했으며 그나마 잘 자라난 셋째, 넷째아들 역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지 일주일 정도 기억에 불과하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의 머리는 온통 발명과 관련된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째 부인인 미나 밀러에게는 모스 부호로 프러포즈를 했을 정도다. 미나는 첫 부인보다 성격이 더 드셌고 에디슨이 발명에만 매달려 연구실에만 붙어 있자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다 먹기 전까지는 발명이고 뭐고 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거의 없었던 집안은 곧 난장판이 됐고 자식들도 모두 형편없는 삶으로 추락하게 됐다. 장남인 토머스 에디슨 주니어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에디슨의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이런 아들에게 에디슨은 더욱 매몰차게 굴었다. 에디슨은 자신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지 못하도록 명예훼손으로 아들을 고소했으며 개명까지 요구했다. 법원에서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토머스 에디슨 주니어는 토머스 윌러드로 개명한다. 물론 윌러드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이름을 바꾼 댓가로 월 50달러의 용돈을 요구했지만 분노한 에디슨은 아예 무시하며 외면했다. 이후 월러드는 아버지가 돈을 안준다고 고소했다가 패소했다. 사기 피해자들에게 시달리고 막장으로 살다가 결국 에디슨이 죽고 4년 뒤인 1935년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죽는다.


차남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차남인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줬지만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아서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때도 없이 편지를 보내 에디슨을 닦달했다. 에디슨은 분개해 편지를 찢어버리고 무시했으며 이후 이 둘째아들도 큰아들이 죽은지 2년 뒤인 1937년 사망했다.

그나마 세 번째 아들인 찰스 에디슨은 착실한 편으로 훗날 정계로 진출해 뉴저지 주의 주지사가 됐다. 자신이 그나마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찰스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막내인 시어도어 밀러 에디슨은 발명가로 어느정도 성공해 아버지의 가업을 이은 유일한 자식이 됐다. 시어도어는 200가지가 넘는 발명품을 만들어내고 100여가지 특허를 냈으며 사업가로서도 성공한 편이었다. 이후 1987년 에디슨 탄생 140주년 행사 때 인터뷰도 했지만 그도 아버지에 대해선 그리 추억이 없다고 섭섭해했다고 한다.


디지털뉴스본부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