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4:1∼16)에 나타난 최초의 가족 내 비극인 형제 살육은 많은 화가들이 다뤘던 주제이다. 대개 화가들이 살해자인 형 가인과 피살자인 아우 아벨 두 사람만 묘사하곤 했는데,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는 다른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곧, 그는 살육 순간이 아닌 남은 가족이 겪는 애통함에 더 초점을 맞추어, 사진을 보는 듯 사건의 정황을 전달하고(아들이 죽었고), 인물들의 심리를 표출한다(애달픔은 그지없다).
이 그림의 한 특징은 대체로 강렬한 색이 없다는 점이다. 남녀의 피부는 다소 어둡거나 더 밝은 색조로 처리된다. 땅에 보이는 피의 얼룩만이 다른 색과 대조를 이루며 이 드라마의 성격을 일깨운다. 배경에는 아벨이 드린 듯한 제물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제단이 있다. 연기는 하늘을 뒤덮은 폭풍 구름과 섞이며, 사건의 기원과 비극적 결과를 명시한다. 그림 속의 아들은 살해됐다는 데서 슬픔이 증폭된다. 패역의 상황, 부모의 비통을 표현함으로써 부그로는 인류 최초의 피에타를 피라미드 구도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가인’이 빠졌다는 점이다. 가인은 살인범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했지만, 여기에선 잊힌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에 아벨은 죽은 자이나 기억해야 할 존재로 부각된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처지에선, 죽은 둘째아들의 부재이든,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맏아들의 부재이든, 다 형언 못할 상실감과 고통을 야기한다.
좀더 잘 가르치고 양육할 걸 하고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져보면 비극의 뿌리가 자신들이 행한 불순종에 있음을 자책하고 자책했을지도. 하지만 하나님은 슬픔 가득한 부부를 방치하지 않았다. 새로운 생명인 셋을 (이름 뜻대로) ‘대신 주셨다, 허락하셨다.’ 아리고 힘든 애도(mourning) 후에 위로의 아침(morning)이 밝아온다. 폭압과 불법이 난무하는 밤은 사라지고 평화와 적법이 숨쉬는 새벽이 도래한다.
한데 이 사건은 한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기와 질투, 공연한 시비와 제재, 무시와 배제, 사악한 속셈과 음모, 압제와 속박 등. 사회와 더 큰 가정공동체인 국가 세계 안에서도 벌어지는 암울한 현상이다.
우리에겐 두 길이 있다. 가인처럼 악한 자에게 속할 것인가, 아벨처럼 의로운 일을 할 것인가. 당연히 “우리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요일 3:12). 나이를 떠나 누구든 ‘형’ 가인이 될 수도, ‘아우’ 아벨이 될 수도 있다. 가인과 같은 ‘연장자’의 정신을 지닐 것인가(저렇게 늙진 말아야지), 아벨과 같은 ‘젊은이’의 정신을 지닐 것인가(그렇게 젊게 살아야지!). 에덴의 동쪽 놋(‘떠돌아다님’이란 뜻)에서, 이 거리 저 광장을 배회하는 가인의 모습으로 살 것인가. 그건 그릇된 믿음으로 갈등과 대립의 세력으로 남는 것이며, 살아 있음에도 죽은 목숨으로 사는 것이다. 아니면 죽어서도 믿음의 선진으로서 기억되는 아벨의 모습으로 살 것인가. 그건 아주 죽는 삶이 아니며, 믿음과 의로움의 표상으로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늘 그렇듯 우리 앞엔 선택의 갈림길이 있다.
금빛내렴 <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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