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최민우의 블랙코드] '사쿠라'의 명예회복

바람아님 2017. 4. 16. 00:06
중앙일보 2017.04.14. 02:56
최민우정치부 차장
중도주의(中道主義)를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우파나 좌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 인 정책을 실시하자는 이념.” 그럴듯한 개념과 달리 현실 정치권에서 중도란 ‘회색분자’나 ‘기회주의’ 등으로 폄하되곤 했다. 그중 으뜸은 ‘사쿠라’다. ‘사쿠라’의 어원은 일본어 ‘사쿠라니쿠’(櫻肉)로 색깔이 연분홍색인 말고기다. 쇠고기인 줄 알고 샀는데 먹어 보니 말고기였다는 얘기다. 박정희 정권에서 ‘중도통합론’을 들고 나온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가 사쿠라로 몰린 게 대표적 예다. 이처럼 ‘중도’는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나 균형보다는 변절이란 뜻으로 더 많이 통했다. 고(故)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엔 이런 대목도 나온다. “그도 저도 아닌 중간에 서 있으면 사쿠라로 몰릴까 봐 선명하고 극단적인 색깔을 택해야만 했다.”

왜 중도를 업신여겨 왔을까. 술을 먹어도 밤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야 한다고들 하지 않나. 무엇을 하든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기질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무엇보다 뒤틀린 근현대사가 중립적 태도를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일제 침략에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군부 독재를 향해 온몸 던지고 있는데 팔짱 끼고 모른 척하고 있다니, 불의에 대한 암묵적 동의 아닌가. 적으로 규정하면 차라리 명확할 것을, 중간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들이 더 꼴 보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사가 늘 무 자르듯 두 동강 낼 수는 없는 법. ‘중도’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진 사이 대립적 갈등은 심화해 왔다. 단지 보수-진보로 갈라진 정치권만이 아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의 사회통합지수는 0.21로, 조사대상국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29위였다. 최하위 30위는 분쟁 지역인 이스라엘(0.17)이었고,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은 그리스(0.25, 26위), 슬로바키아(0.23, 28위)보다도 낮았다. 게다가 지난 20년간 한국의 사회통합지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극단에 대한 반작용일까. 최근 중도가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자신의 이념 성향을 중도라고 생각하는 이가 올 초 26%에서 3월엔 29%로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보수의 전략적 지지를 받는 안철수와 진보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문재인 사이에서 중도가 이번 대선의 키를 쥘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그러니 중도라고, 사쿠라라고 너무 주눅 들 필요 없다. 복잡한 세상, 오락가락하면 좀 어떤가. 어찌 양자택일만 있단 말인가. ‘짬짜면’을 시켜도 괜찮다.


최민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