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역사와 현실]'적폐 청산'의 함정

바람아님 2017. 5. 11. 08:37
경향신문 2017.05.10. 14:40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 인식이 많다. 민생과 관계없는 벼슬아치들끼리의 권력투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맞는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학계는 당쟁이 시작된 시기를 선조 즉위(1567) 무렵으로 보는데, 이 당시 조선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선조 앞 왕인 명종 때 조선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몹시 어지러웠다. 홍명희 소설의 주인공 ‘임꺽정’이 활약했던 시대이다. 문정왕후가 심약한 외아들 명종을 허수아비로 앉혀두고 20년 동안 권력을 전횡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생은 극도로 어려웠고, 정의로운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태도는 몹시 비판적이었다. 임꺽정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각 고을)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조정의) 재상들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은 더러운 욕심이 한이 없기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그들을 섬긴다.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어, 도적이 안 되면 살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죽음의 구덩이에 스스로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는다. 이것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조정이 맑고 수령이 바르면, 칼 든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단지 군사를 몰아서 체포하려고만 하면 임꺽정이 체포되어도 또 다른 도적이 뒤이어 일어날 것이다.”


한편, 부도덕하고 무능한 권력에 대해 관료와 지식인들이 보여준 개인적 처신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문정왕후에 충성하며 스스로 권력의 일부가 되었던 사람들도 있었고, 겉으로는 적당히 품위를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권력에 굴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권력에 저항하다가 귀양을 간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권력에 거리를 둔 재야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다.


문정왕후 사망 2년 뒤 명종이 아들 없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30세 전후의 젊은 지식인들이 관리가 되어 대거 조정에 들어갔다. 그 선두에 율곡 이이가 있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목소리 높여 주장했던 것이 ‘적폐 청산’이다. 지극히 당연하고 정의로운 요구였다. 먼저 구권력에 빌붙어 악행을 일삼았던 사람들을 처벌했고, 다음으로는 구권력에 탄압받았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정으로 불러들여 빠른 승진으로 보상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쟁의 불씨가 피어났다. 지난 시절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농도에 따라서 청산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범위가 달랐다. 나이 많고 관직이 높았을수록 그 범위는 좁았고, 젊고 관직이 낮을수록 그 범위는 넓었다. 후자 그룹의 대표격인 이이의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생생히 전해진다. “오늘날 대신은 구체제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원칙과 태도를 바꿔가며 겨우 자기 몸이나 보전한 사람들입니다. (중략) 구체제에서 벼슬이 높았던 자일수록 행동이 비열하고, 요직에 있던 자일수록 그 인간적 재질은 하등에 속합니다.”


이이는 자신만만했다. 이 당시 조정에 나온 젊은 관료들 역시 그랬다. 그들의 자신감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지난날 정치가 바르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무능하고 부도덕했기 때문이며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짧은 시간 안에 정치를 혁신하고 민생을 회복할 수 있다고 진실로 믿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들의 믿음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적폐 청산은 당쟁의 불씨가 되었고, 새로운 정치는 거의 출발도 못했다.


젊은 그들이 주장한 적폐 청산은 정의로운 주장이기는 했지만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될 수 없었다. 최종 목적은 민생 개선이다. 문제는 정치세력 교체를 동반하는 적폐 청산은 그들 이익에 부합했지만, 민생의 개선은 그들 현실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그들은 먹고사는 데 별 걱정 없는 사람들이었다. 민생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현실’이 아닌 ‘관념’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적폐 청산은 ‘민생 회복’으로 이어지는 대신에 그들끼리의 권력투쟁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적폐 청산을 외치다, 어느 순간 그것을 그들 정치행위의 최종 목적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정치인들의 관심은 이제 다음 선거와 개헌으로 향할 것이다. 아마도 개헌을 놓고도 그들 관심은 온통 권력 구조 개편에만 집중될 것이다. 대통령이나 권력 구조를 바꾸는 것은 모두 정치세력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이고 수단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평범한 시민 개인의 일상적 삶이 얼마나 개선되느냐이다. 그것만이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정치세력 교체에도 불구하고 민생이 개선되지 않자 이이는 크게 고민하고 크게 반성한 후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상소, 만언봉사를 올렸다. 그 첫 문장에 그의 고민과 우려가 담겼다. 지금 말로 바꾸면 이렇다. “정치는 시대정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대정신을 모르고, 일을 함에 실효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훌륭한 임금과 어질고 지혜로운 신하가 만난다 해도 치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