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과 남북관계 보는 문재인 청와대의 두 얼굴
노무현은 양쪽 전문가들에게 들볶이면서도 균형 잡았다
매케인은 지난달 19일 대미 특사를 만나 27~28일 방한 계획과 문 대통령 면담을 희망했다. 이 메시지는 24일 오후 청와대의 미·중·일 특사 보고 때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정의용 외교안보실장 등도 배석했다. 그렇다면 남은 4일(24~28일) 중 청와대가 언제 ‘28일 오찬’을 통보했는지만 밝히면 끝날 문제다. 매케인 측이 거듭 면담 확인을 요구하다 결국 한국만 빼고 호주-베트남-싱가포르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미국 정치인은 다 만나줘야 하느냐”며 억울한 표정이다. 하지만 매케인은 다르다. “사드 비용은 미국이 부담해야 한다”고 밝힌, 청와대가 초청해서라도 만나야 할 친한파 거물이다. 돌아보면 그 무렵인 5월 말부터 청와대 분위기가 갑자기 경직되는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문 대통령이 “사드 보고 누락은 매우 충격적”이라고 한 뒤 사드는 아예 기피대상이 됐다. 안현호 일자리수석 내정자가 낙마하면서 코드 인사 색채가 뚜렷해졌다. 지금 청와대 정책실 쪽에는 ‘분배론자’가 득세하고 외교안보 쪽에는 ‘자주파’가 넘쳐난다. 걱정되는 것은 ‘집단 사고’의 함정이다. 혹 매케인 방한 불발이 그의 대통령 면담에 총대를 멨다가 ‘친미파’로 찍힐까 봐 몸을 사린 게 아니었길 바란다.
지난달 31일 오후 두 외국인의 표정을 보면 요즘 청와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딕 더빈 미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는 문 대통령과 40분간 면담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한국이 원치 않으면 사드 예산을 딴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발언을 쏙 빼고 브리핑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더빈은 “청와대를 나오면서 주한미군이 걱정돼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거꾸로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전 대통령의 얼굴은 환했다. 1시간 넘게 환대를 받았다.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부터 훈훈하다. “두 분은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해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전처럼 나서 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메가와티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추진하겠다. 성사된다면 그때 문 대통령의 안부를 전해도 괜찮겠나’라고 물었고, 문 대통령은 ‘오늘의 모든 이야기를 전해도 좋다’고 답했다.” 사실상 남북 정상회담 메신저를 부탁한 것이다.
대선 때 문 대통령의 “당선되면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는 발언이 빈말이 아닐지 모른다. 최고지도자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측근들이 제일 먼저 안다. 어쩌면 한·미 동맹과 남북대화에 대한 문 대통령의 속마음을 읽은 외교안보라인이 메가와티와 면담에 열을 올리고, 매케인의 면담엔 소극적으로 처신했는지 모른다.
되짚어보면 노무현은 전혀 딴판이었다. 2002년 12월 말, 노 대통령 당선자는 안가에서 이홍구 전 총리와 따로 만났다. 그는 의원 시절 정당은 달랐지만 이 전 총리를 외교·통일의 최고 전문가로 깎듯이 대접했다. 노 당선자는 한참 망설이다 의견을 구했다. “주변에선 남북관계가 중요하니 미국과 거리를 두라고 야단입니다. 그래도 저는 오래 고민한 끝에 ‘지금 대한민국에 제일 중요한 나라는 미국’이라 결론 내렸습니다. 제 생각이 맞지요?” 이 전 총리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정확한 판단입니다. 튼튼한 한·미 동맹 위에서 남북관계나 한·중 관계를 모색해야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반미면 어떠냐’고 했지만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를 추진했다. 이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이 의외의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했다.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도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3명(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 반기문 외교보좌관) 때문에 ‘골치 아파서 못살겠다’고 토로했다”고 증언했다. 노무현은 양쪽 전문가들에게 들볶이면서 균형을 잡은 것이다. 그런 경험을 옆에서 지켜본 문 대통령이다. 앞으로 노무현의 정치·외교적 상상력을 얼마나 계승할지 향후 행보가 궁금하다.
이철호 논설주간
'時事論壇 > 時流談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민우의 블랙코드] '협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0) | 2017.06.24 |
---|---|
[기자의 시각] "특보 아닌 교수"라고? (0) | 2017.06.23 |
[경제교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사회자유주의는 무엇인가요? (0) | 2017.06.21 |
[김대중 칼럼] 보수는 궤멸의 길로 가고 있나 (0) | 2017.06.20 |
정권의 위기, 세 번은 온다 (0) | 2017.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