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연수는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중화가다. 그는 초상화에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것으로 『서경잡기(西京雜記)』는 기록한다. 황제의 궁에는 수천 명의 궁녀가 황은(皇恩)을 입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고 한다. 환관이 궁녀의 사주와 미색을 따져 몇몇으로 추리면 모연수는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 황제에게 바친다. 황제는 그 그림들을 보고 한 명의 미인을 선택하는 식이다.
궁녀들은 잘 그려 달라고 값비싼 물건과 보화로 화가에게 다투어 줄을 섰다. 그가 받은 뇌물의 값에 따라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미색이 달라졌다. 이는 일종의 포토샵에 따른 대가다. 오늘날로 치면 강남의 명품 성형외과를 제대로 운영했던 셈이다.
모연수의 조작을 거치지 않은 탓일까. 소군은 한(漢)나라를 무력으로 협박하는 흉노의 우두머리에게 시집보낼 화번공주(和蕃公主)로 뽑히고 만다. 소군이 떠나는 날 아침 그녀를 본 원제는 분통을 터뜨렸다. 당대 최고 미인을 억울하게 오랑캐에게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진실의 조작을 물어 원제는 모연수를 처형했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 그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운 유명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은 이길용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를 직접 실행에 옮긴 사람은 청전(靑田) 이상범 화백이다. 당시 신문사의 삽화와 도안을 맡고 있던 이상범은 직접 붓을 들어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버렸다. 이 사건으로 신문은 무기 정간되고 이길용과 이상범 등 8명이 구속됐다. 이상범이 인화지에 흰색을 덧칠한 것은 얼핏 사진이 지닌 리얼리티를 파괴한 행동이고 언론의 객관성을 포기한 만행으로 비칠 법하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으로 일장기에 묻힌 조선인의 건장한 신체와 월계관 그늘에 숨은 안광이 드러났다. 이들의 조작은 오히려 조선의 독립의지와 그 진실을 밝힌 일이 됐다.
모연수는 초상화를 조작해 황제의 눈을 가리고 아까운 미녀를 이국에 보냈다. 식민지 화가 이상범은 손기정의 일장기 사진을 조작해 그가 일본이 아니라 조선의 대표라는 또 다른 진실을 깨우쳤다. 이처럼 그림은 사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원심력과 다른 곳으로 나아가 그것을 가공하려는 구심력을 동시에 갖는다. 모연수와 이상범의 그림 조작, 이른바 ‘뽀샵’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화가인 나에게 최근 두 시책이 눈에 띈다. 하나는 ‘블라인드 채용’이다. 공기업부터 사진을 안 보고 신입 직원을 뽑겠다는 것이다. 프로필 사진으로 생계를 꾸려 온 동네 사진관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됐다. 다른 하나는 까다로워진 여권 사진 규정이다. 정면의 얼굴과 양쪽 눈썹과 귀의 노출, 장신구와 짙은 화장마저 금지시켜 버렸다. 사진 속 인물의 더 명확하고 진실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가을 전시회 도록에 쓸 사진을 놓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깊다. 이상범 화백은 존경한다. 하지만 모연수를 비난할 자신은 없다. 나이가 들수록 거울을 보면서 이상범과 모연수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그냥 이번 전시에는 세월이 흐른 대로의 얼굴을 넣어야겠다. 현대판 모연수는 내년 즈음에 다시 고민해 볼까 한다.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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