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강천석 칼럼] 先進國으로 가는 막차 시간

바람아님 2017. 9. 3. 08:43
조선일보 2017.09.02. 01:12

'後發 利點' 살려 경제 일으킨 한국
대통령, '유럽 病者 독일' 살린 슈뢰더와 대화 나누기를
강천석 논설고문

한국은 늦게 출발해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다. 경제 개발 동기생(同期生)은 수십 나라에 이르지만 삼성·현대차·LG 같은 세계적 독자 브랜드를 갖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성공한 나라들은 닮은 구석이 있다. 그중 하나가 '후발(後發)의 이점(利點)'을 잘 이용했다는 것이다. 출발이 늦었다 해서 손해만 보지는 않는다. 지각해 덕을 보는 경우도 있다.


후발 주자(走者)는 앞서 달리는 상대의 장점을 쉽게 모방·흡수할 수 있다. 선발(先發) 주자가 어디서 어떻게 넘어졌나를 관찰하면 불필요한 시행착오도 피해갈 수 있다. 후발 주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경쟁 우위(優位)를 확보하고 선발 주자를 추격·추월(追越)해 역사 흐름을 바꾼다. 독일과 일본은 '후발의 이점'을 살려 선진국으로 도약한 영리한 나라다.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답게 각 분야 금메달을 쓸어 담다시피 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공(公)은 제철(製鐵) 분야 금메달이 산업혁명의 지각생 독일에 돌아간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기업가와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불길한 느낌을 전했으나 귀담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4년 후 파리 만박(萬博)에선 후발 국가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메이지(明治) 유신을 전후해 등장한 일본 섬유 산업도 비슷한 코스를 밟았다.


독일과 일본을 선두로 이끈 혁신 기술의 고향은 영국이다. 혁신 기술은 주류와 기득권이 장악하고 있는 중심부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출현한다. 기업가들은 새로운 설비 투자가 필요한 혁신 기술 대신 과거 방식에 안주(安住)하기 쉽다. 1850년대 무렵 영국에 출현한 제철과 방직 분야 혁신 기술이 그런 불우한 처지였다. 독일과 일본은 고향에서 푸대접받던 혁신 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해 '후발의 이점'을 극대화했다. 독일과 일본이 올라탄 차가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막차였다.


기술 세계에선 효율과 비효율, 효과와 역효과의 차이가 빨리 드러난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판단이 서면 쉽게 차를 돌릴 수 있다. 문제는 제도(制度)다. 많은 후발 국가가 나라의 틀과 운영 방식을 결정하는 제도라는 장애물에 걸려 주저앉았다. 제도는 실시하기 전엔 결함을 가려내기 힘들다. 부작용도 천천히 나타난다. 통증(痛症)이 예리하지 않으니 자각 증상도 없다. 어딘가 불편하다고 느꼈을 때는 병이 몸 전체에 퍼진 상태다.


제도가 무서운 것은 중독(中毒) 증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베네수엘라는 잘못된 제도의 해악(害惡)을 보여주는 시범 케이스다. 한때는 '천국(天國)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로 불렸던 나라라서 국민 고통이 더하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나라, 그리스는 조상(祖上) 덕에 관광 수입이 굴러들어오는 나라다.


2016년 베네수엘라 물가는 700% 폭등했다. 빈곤 인구 비율은 82%로 치솟았다. 끼니를 거르는 가정이 많아 국민 75%의 체중이 평균 8.6kg이나 줄었다는 믿기지 않는 연구도 나온다. 국민 생계(生計)는 나라가 책임진다던 호언장담의 말로(末路)다. 공영방송 KBS가 2006년 2월 18일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 일방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代案)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1시간짜리 특집 방송을 내보냈던 나라 현실이 이렇다.


2010년 국가 부도(不渡)의 절벽에서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그리스도 비슷하다. 출근하는 젊은이 모습을 구경하기 힘들다. 근로자 4명 중 1명이 공무원이고 회사 상당수는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조선(造船) 강국 소리를 듣던 이 나라 제조업 비율이 5.7%다. 긴축 재정과 연금 삭감에 반대하는 노조 시위대가 개근(皆勤)하듯 시가지를 쓸어간다.


불행의 씨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세 차례 13년 동안 총리를 지낸 파판드레우 시대에 뿌려졌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출신인 그는 공무원 대폭 증원·의료보험 적용 확대·연금 인상·저소득층 자녀 해외 유학 지원 등 파격적 복지 시대를 열었다. 몰락은 그때 시작됐다. 그리스 국민 48%는 지금도 파판드레우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총리'로 꼽고 있다. 베네수엘라 친(親)정부 시위대는 여전히 차베스 사진을 앞세우고 행진한다. 중독은 이만큼 무섭다.


문재인 정부 내년 예산은 '복지 시대' '노동 시대'의 개막(開幕) 선언문 같다. 이 선언문에 '후발 국가의 이점'을 이어갈 지혜(智慧)가 담겨 있을까. 문재인 시대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 시간과 겹친다. 막차를 놓치면 그만이다. 500만 실업자와 '유럽의 병자(病者)'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나라 운명을 개척해야 했던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자서전이 출간됐다. '독일 경제 재생(再生) 계획 10개 항'에 담을 노동 유연성 확보와 의료보험·연금 개혁을 놓고 번민(煩悶)의 밤을 보냈던 슈뢰더와 책을 통해서나마 대화해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