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칼럼
최근에는 안희정 충남지사도 적폐가 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에게도 사이버 공간에서 적폐라는 경고와 욕설이 쏟아진다. 안 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다. 그런데 왜 문재인 대통령 열혈 지지층(‘문빠’ 혹은 ‘문팬’)의 적폐가 되었을까. 지난 대선 치열했던 경선의 앙금이 남은 걸까. 김 대법원장은 또 어떤가. 사법 개혁의 적임자라고 임명한 지 겨우 두 달이 지났다. 논란의 배경을 보면 더 이해가 안 된다.
안 지사는 지난달 28일 서울 성북구청에서 공무원들에게 강연을 한 뒤 질문에 답한 것이 문제였다. “현재 진행되는 것을 보면 다른 의견을 싫어하는데 그럼 안 된다. 처음부터 ‘닥치고 따라와’ 구조로 가면 잘못된 지지운동이다.”
맞는 말 아닌가. 사람들의 의견이 다 같을 수 없다. 더구나 정당들이 의견이 같으면 다른 당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대화와 타협을 민주 정치의 기본이라고 하는 건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 가지 사상만 강요하는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그러니 안 지사도 “민주주의의 공론의 장은 다양한 견해와 도전과 토론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팬’이 가장 싫어하는 박근혜 정부는 ‘불통(不通) 정부’라고 비난받았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려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는 반대 의견을 힘으로 틀어막았다. 이것이야말로 적폐다. 그런 잘못된 국정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문팬은 안 지사를 적폐라고 한다. 문 대통령의 ‘적폐’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나쁜 사람’ 같은 것인가. 정치인들까지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서생(書生) 같은 훈시”라고 나무랐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만약 그가 차기 지도자가 되려면 ‘MB(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최순실 재산 몰수’하자고 전사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야 하지 않을까”라고 주문했다.
정치 지도자가 법 절차보다 물리적 시위를 통해 정적(政敵)을 공격해야 하나. 그것이 차기 지도자의 조건이라니. 잘못된 행태를 바로 잡는 게 아니라 반대편 사람을 때려잡는 게 적폐 청산이 됐다. 물론 적폐를 저지른 사람은 응징해야 한다. 그렇지만 갑·을의 자리만 바꾸어 내가 권력의 ‘갑질’하는 것을 적폐 청산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 대법원장의 경우는 더 어이가 없다. 재판의 중립성을 지켜달라는 말이 적폐로 지목됐다. 그는 1일 “요즈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재판 결과를 과도하게 비난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이는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의 이념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매우 걱정되는 행태”라고 에둘러 말했다. 그런데도 문팬은 차마 옮길 수 없을 정도의 욕설을 퍼부었다.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난 게 문팬을 자극했다. 무죄라고 결론 낸 것도 아니다. ‘다툼의 여지가 있다’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정도다. 불구속 수사는 형사소송의 원칙이다. 유죄 추정, 징벌적 구속이야말로 오래된 사법 적폐 아닌가.
그런데도 신광렬 수석부장판사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문팬은 말할 것도 없다. 집권당의 정치인들도 신 판사를 적폐로 몰았다. 송영길 의원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TK 동향에 연수원 동기로 같은 성향”이라고 몰아세웠다. 고향이 같다고 같은 성향이라니. 안민석 의원도 “적폐판사들을 향해 국민과 떼창으로 욕하고 싶다”며 적폐 판사로 단정했다. 이런 행태를 김 대법원장이 점잖게 경계한 것이다.
사법 적폐는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을 위협하는 정치권력의 압력이다. 과거 사법부의 부끄러운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나.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고, 이제 뒤집어놓고 판결하자는 건가. 과거 정권의 비리가 지금 정권에게는 미담이 될 수 없다. 내놓고 법원에 압력을 가하면서 적폐를 청산하라는 건 코미디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은 ‘사구(四舊)’ 파괴운동을 벌였다. 낡은 사상·낡은 문화·낡은 풍속·낡은 관습을 말한다. 요즈음 말하는 적폐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마오쩌둥의 권력을 재확립하기 위한 숙청 과정이었다. 경쟁세력의 뿌리를 뽑았다. 거기에 홍위병이 철저히 이용됐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마오는 새 중국을 건설한 공로자다. 하지만 권력을 지키려고 역사를 후퇴시켰다. 덩샤오핑은 권력을 독점할 기회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자기 생각을 제도로 완성해 새로운 중국을 만들었다. 덕분에 아직 그가 만든 틀을 유지하며 미국의 경쟁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권력자는 영원히 권력을 쥐고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어림없다. 그래서 정권을 넘겨도 걱정 없는, 적폐가 되살아나지 않을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을 바꿔봐야 대통령이 바뀌면 말짱 도루묵이다. 적폐 청산이란 복수극을 벌이지 말자는 것 아닌가.
‘사람 사는 세상’은 함께 사는 나라다. 안 지사의 말처럼 5000만의 정부다. ‘당신들만의 나라’가 아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바퀴벌레로 생각하면 안 된다. 박멸 대상이 아니다. 생각이 다르지만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민주주의다. 당신 눈에는 그들이 제거 대상이지만, 그들 눈에는 당신이 제거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또다시 적폐 리스트를 만들 건가. 그런 리스트가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게 적폐 청산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가.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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