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글로벌 터치] "한국에 선택할 게 있기는 한가"

바람아님 2017. 12. 2. 09:40

조선일보 2017.12.01. 03:14

 

美에서 '코리아'는 90%가 북한.. 日, 미에 "도울 일 없나" 묻는데
한국은 막무가내 요구만 하고 미국 움직일 분석·전망 못 내놔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워싱턴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존재감이 이렇게까지 약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미국 언론에 등장하는 '코리아'는 90%가 '노스 코리아(북한)'다. 한국은 무력한 조연이자 피해자로 가끔 등장한다.

얼마 전 남미 외교관들 저녁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볼리비아 외교관이 "한국 너무 불쌍하다. 북한에 '제발 우리 공격하지 마' 하고 사정하는 것밖에 대책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멕시코 정치인은 "한국같이 똑똑한 나라가 20년 넘게 북핵에 시달리며 그저 보고만 있었겠나. 벌써 몰래 핵무기를 만들었겠지" 했다.


더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최근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 나란히 앉은 매티스 국방장관과 틸러슨 국무장관 모습이다. 코리 가드너 상원의원이 "미국이 당면한 가장 긴급한 국가 안보 위협은 북한이라는 데 동의하느냐"고 묻자 두 장관은 차례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지난여름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닿을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증명한 이후 미국이 북한을 '내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이보다 잘 설명하기도 어렵다. 미국은 "ICBM 이전과 이후, 대북 접근 방식이 같을 수 없다"는 뜻을 한국에 강하게 전달했다고 한다.

10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제임스 매티스(왼쪽) 미 국방장관이 렉스 틸러슨(오른쪽) 국무장관에게 물을 따라주고 있다. 매티스 장관은 이날 북한의 공격이 임박할 경우 "미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로서 (전쟁 명령) 권한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미 헌법상 전쟁선포권은 원칙적으로 의회에 있지만 긴박한 경우 대통령 명령만으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AP 연합뉴스

미국의 직접적 안보 위협이 된 북핵·미사일 대응 담론에 한국은 없다. 공식적으로 미국이 비핵화란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지만, 워싱턴 전문가들은 '비핵화가 미국의 전략 목표로서 옳은가'를 고민한다. 미국이 군사적 방안을 동원해 북핵과 미사일을 해결하려다 자칫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넣을 위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할 능력을 갖춘 김정은을 그대로 두는 것보다 더 위험한가'라고 되묻는다. 미국이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북한이 핵 반격 능력을 갖추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미국과 한국은 불화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하자,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관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에 무슨 선택이 있느냐"는 것이다. 의회 관계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북핵 해결을 위해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한 거냐"고 했다. 한국이 북한을 설득할 대화 채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을 제압할 독자적 군사력이 있지도 않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느끼는 한국의 가장 뼈아픈 결핍은 북한 관련 대책이든 분석이든 전망이든 미국이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통찰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 전문가는 "같은 한국 사람이니 북한에 대해 차원이 다른 분석과 전망을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비교되는 나라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닉슨에서 오바마까지 미국 대통령의 '중국 과외 교사' 역할을 했던 리콴유 전 총리의 전통을 이어 여전히 중국에 대한 통찰력을 워싱턴에 불어넣어 주고 있다고 한다.

워싱턴을 움직일 만한 아이디어가 있어야 워싱턴의 귀를 잡을 수 있다. 몇 달 전 미 하원의원들의 한국 스터디 그룹에서 한 의원이 한국 측 참석자들에게 "당신들 생각을 좀 들어보자. 미국 대통령이 벌써 네 명째 이 문제를 붙들고 있는데 해결이 나지 않으니 우리도 답답하다"고 했다.


하지만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워싱턴에서 한국은 뭔가 사정하러 다니는 나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늘 길고 긴 요청 리스트를 들고 와 막무가내로 사정한다"는 평이 돌아다닌다. 빈말이라도 "우리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로 시작하는 일본과는 다르다고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맹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중견국으로서 역할을 추구하던 한국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북한이 75일 만에 ICBM 도발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외교 안보 참모들이 기다렸다는 듯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미국의 예상보다 빠르게 진전되는 만큼 워싱턴에서 한국이 움직일 공간은 빠르게 줄고 있다.


강인선 워싱턴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