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박두식 칼럼] '지지율 70%'에 눈먼 정권의 휴브리스

바람아님 2017. 11. 30. 09:47

조선일보 2017.11.29. 03:17


이 정권은 자신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했다고 자신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정권의 지분은 40%
이걸 잊은 채 오만을 키우고 있다
박두식 부국장

한국갤럽이 지난주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72%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취임 6개월을 전후한 시점에서 문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높았던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83%)뿐이다.

대통령에게 높은 지지율은 커다란 정치 자산이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내면서 이 사실을 체감했다. 취임 첫해 노(盧) 정권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이겼어도 승자의 여유를 부릴 처지가 못 됐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호남 세력이 주축인 여당 내에서도 '노무현 세력'은 소수였다. 이를 의식한 듯 대선 승리 이틀 만에 정권의 정치 고문 역을 맡고 있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공개적으로 "대선에서 우리 당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선 승리는 여당이 아니라 '노무현과 그 세력의 몫'이라는 뜻이다. 여당 내의 반대 세력조차 포용할 수 없는 협량(狹量)에 노 전 대통령 특유의 '비(非)주류·소수파'라는 피해 의식이 더해지면서 정권의 입지는 좁아졌다. 노 전 대통령 지지율은 국정 운영이 힘겨울 만큼 추락했다.


취임 석 달 만에 노 전 대통령 입에서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는 말이 나오더니 그로부터 석 달 뒤엔 대통령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나섰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 첫해는 대통령에게서 시작된 혼돈과 분란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다. 대통령이 지지층은 물론 국민과 불화를 빚고 헌정(憲政) 질서와 충돌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7 대한민국 혁신성장 전략회의'에 참석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얘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권의 모태는 '노무현'이다. 그러나 이 정권에선 노 정부 시절 만연했던 '비주류·소수파'라는 피해 의식이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거꾸로 여권 핵심 인사들은 자기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가 됐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곤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7대3' 구도를 자주 거론한다. 여론의 70%가 자기들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 정권의 국정 운영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당과 부딪칠 때나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을 향해 "언제까지 30%도 안 되는 소수·극단 진영에 갇혀 있을 것이냐"고 되묻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던 촛불 인파, 뒤이은 대통령 탄핵과 대선 승리, 취임 6개월이 지났어도 70%를 웃도는 대통령 지지율, 회생 기미가 보이지 않는 보수 야당의 지리멸렬한 상황 등등이 이 정권으로 하여금 이런 자신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 정권은 지지율 70%의 힘을 '과거 9년과의 전쟁'에 쓰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물러난 이후 보수 정당이 집권했던 9년을 적폐로 몰아세우고 있다. 이들의 '과거 집착'은 전혀 새롭지 않다. 노 정권은 집권 2년 차에 지지율 반등 계기를 잡았다. 2004년 3월 국회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강행 통과시키자 여론의 역풍이 불면서다. 그 직후 치러진 4월 총선에서 '노무현 세력'이 만든 열린우리당이 국회 다수당이 됐고, 대통령 지지율도 치솟았다. 노 정권은 이렇게 되찾은 힘을 과거와의 전쟁에 쏟아부었다. 당시엔 2002년 대선 이전의 한국 현대사 전체가 청산 대상이 됐다. 일제(日帝) 시대는 물론이고 구한말 때 문제까지 건드렸다. 정부 각 부처는 '과거사 진상 규명위'를 만드는 부산을 떨었다. 그렇게 정권의 힘을 소진한 끝에 노 전 대통령의 임기 말은 여당까지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는 참담한 상황을 맞았다. 노 정부에서 이 나라 현대사 전체를 대상으로 격전을 치렀던 이들이 이제는 노 정권 이후 보수 집권 9년을 놓고 사생결단 전투에 나선 셈이다.


권력의 실패를 논할 때 정치학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휴브리스(hubris·오만)라는 단어다. 아널드 토인비에 따르면 이 말은 "성공을 거둔 소수가 그에 자만해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지적·도덕적 균형을 상실하고 판단력을 잃는 것"을 뜻한다. 요즘 이 정권을 보면 휴브리스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현재 국회에서 여당의 지분은 40.5%(300석 중 121석)다. 지난 5월 대선 때 문 대통령의 득표율 41%와 거의 같다. 이 수치가 현재 이 정권이 이 나라 운영에서 갖고 있는 실제 몫일 것이다. 60%를 차지하고 있는 야당과 협력하는 협치(協治)는 선택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성공을 위해서도 꼭 있어야 할 필수 사항이다.


그러나 이 정권은 '대통령 지지율 70%'를 앞세워 윽박지르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7대3'이라는 신기루에 눈이 멀어 정권의 휴브리스만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번번이 국회와 충돌해 온 인사(人事)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휴브리스가 괴물로 자라면 권력은 스스로 무너진다. 취임 6개월 기준으로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6%로 임기를 마쳤고, 셋째로 지지율이 높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지막은 5%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