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새해 여는 종소리, 보신각종 만든 사람은 누구?

바람아님 2017. 12. 31. 09:38
동아싸이언스 2017.12.30. 10:30


새해는 제야의 종 행사와 함께 열린다. 2018년 새해도 12월 31일 자정부터 서른 세 번 울리는 보신각종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옛 보신각종은 몸체에 조선 세조 14년 1468년에 만들어진 범종이라고 새겨져 있다. 높이 3.1m, 입지름 2.28m 크기로, 우리나라 보물 제2호이다. 1985년까지 새해를 알리던 보신각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렇다면 1986년부터 지금까지 제야의 종소리를 울린 보신각종은 무엇일까? 새 보신각종을 만든 국가중요무형문화제 제 112호 원광식 주철장을 만나봤다.

1986년부터 지금까지 제야의 종소리를 울리는 새 보신각종. - 성종사 제공

● 1986년 새해에 새 종소리가 울리다

원광식 주철장은 1960년부터 57년째 총 8000여 구에 달하는 범종을 제작한 장인이다. 그가 제작한 많은 종 중에서도 새 보신각종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 주철장은 “새 보신각종은 무게 2만여 톤에 달하는 대형 범종”이라며 “그때까지 주로 크기가 작은 종을 제작했는데, 새 보신각종을 제작을 계기로 대형 범종 제작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새 보신각종은 당시 서울대 공대 부속 생산기술연구소에서 설계하고 서울대 미대 강찬균 교수가 문양을 조각했다. 이후 원광식 주철장의 손길을 통해 완성됐다. 1984년부터 시작해 제작 기간만 18개월이 걸렸다.

원 주철장은 “당시 대형 범종 제작에는 주로 사형주조법이 쓰였는데, 보신각종 역시 이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사형주조법은 찰흙 같이 성형이 쉽도록 반죽한 모래를 형틀에 붙여 종 모양의 원형을 만든다. 이후 도장을 찍는 것처럼 미리 조각해 둔 목판으로 문양을 찍어내면 주형이 만들어진다. 완성된 주형에 쇳물을 부어 굳히면 범종이 완성된다.


사형주조법은 정교한 문양을 표현하지 못하고 완성된 범종 표면에 굴곡이 생기는 등의 단점이 있다. 하지만 다른 주조법에 비해 작업 공정이 단순하고 비용이 적게 든다.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범종 제작에 쓰던 기법으로 지금도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밀랍주조법(위)과 사형주조법(아래)으로 만든 범종의 문양 비교 사진. 사형주조법과 비교해 밀랍주조법의 공정 시간이 다섯 배 더 오래 걸리고 완성된 문양의 세밀도 차이가 크다. - 성종사 제공

● 천 년 역사의 전통 주조 공법 재현

원 주철장은 “보신각종은 문양이 많지 않은 편이라 세밀한 표현이 중요하지 않았지만, 완성된 종의 표면이 거칠고 기포가 여럿 생긴 것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대형 범종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주조법을 찾기 시작했다.

10년 연구 끝에 찾아낸 방법은 의외로 천 년이 넘은 전통 방식의 주조 공법이다. 바로 밀랍주조법이다. 원 주철장은 “에밀레종, 상원사종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급 종은 모두 밀랍주조법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밀랍주조법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조선 시대까지 범종을 만드는 데 사용한 공법이다. 범종뿐 아니라 향로, 동경 등 세밀한 금속 공예 작품과 금속활자를 만드는 데도 밀랍주조법이 쓰였다. 조선시대 이후 명맥이 끊긴 기술이었으나 끈질기게 전통 종의 복원에 매달린 그의 손을 거쳐 재현됐다.

원광식 주철장이 복원해 만든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 - 성종사 제공

벌집에서 추출하는 밀랍은 끈적끈적한 성질을 지닌 고체다. 밀랍주조법은 이런 밀랍에 소기름을 섞은 ‘초’로 종 모양을 만든 뒤, 고운 모래를 반죽해 표면에 바르고 건조시키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모래 반죽으로 거푸집을 만드는 셈이다. 그 다음 열을 가하면 안에 있던 밀랍은 녹아 흘러내리고 후 속이 빈다. 이 안에 쇳물을 부어 굳히면 종이 완성된다.

하지만 밀랍주조법은 크기가 작은 공예품을 만들기에 적합한 공법이다. 밀랍은 열에 약하고 물러 작품의 크기가 커질수록 모양이 쉽게 틀어지기 때문이다.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신라시대 대표 종 성덕대왕 신종이 실패를 거듭해 20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을 접목하다

원 주철장은 기본 모형을 밀랍 대신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대신 세밀한 표현이 필요한 문양은 밀랍으로 만들어 기본 모형에 부착했다. 이후 거푸집을 만든 뒤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형을 제거하는 과정만 제외하면 밀랍주조법과 같다. 새로운 소재를 더해 밀랍주조법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한 것이다.


밀랍주조법의 과정중 기본 모형 위에 밀랍으로 만든 문양을 부착하는 모습. - 성종사 제공

원 주철장은 이 같은 공법을 ‘범종의 로스트왁스 주조방법’이라는 명칭으로 특허 출원했다. 이 공법으로 성덕대왕신종, 상원사 동종 등 우리나라 국보급 종을 그대로 복원해냈다.

그는 “이렇게 탄생한 공법은 현존하는 범종 주조 공법 중에 으뜸으로 꼽힌다”며 “표면에 기포나 요철이 생기지 않아 종이 울리는 소리도 더욱 청아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평을 증명하듯 그가 만든 범종은 대만을 비롯해 베트남, 태국, 싱가폴, 인도네시아, 미국 등 18개국에 수출됐다.


최근에는 재료뿐 아니라 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다양한 최신 기술 활용에도 신경쓰고 있다. 원 주철장은 “범종의 최적화된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미리 가상 설계를 한다”며 “음향측정장치를 이용해 소리를 분석하고 종의 하단부 일부를 깎아 원하는 소리를 만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앞으로도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을 접목해 더 많은 우리의 종을 복원해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혜림 기자 pungnibi@donga.com]